스웨덴과 핀란드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 신청서를 제출했다. 중립 정책을 200년 이상 유지해왔던 스웨덴과 2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와 특별 관계를 유지해왔던 핀란드가 중립 정책을 포기한 이유는 무엇일까. 국내외 언론과 전문가들이 다양한 분석과 설명을 내놓고 있지만 그 배경과 과정, 그리고 두 북유럽 국가의 나토 가입이 주는 메시지는 각각 다르게 해석되고 있다. 과연 두 나라가 중립국 지위를 포기하면서까지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이고 그 결정 과정에서 우리가 간과한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지 짚어보고자 한다.
중립 정책 포기의 의미
1815년 빈회의에서 중립국 지위를 얻은 스위스와 달리 스웨덴의 중립 정책은 전쟁 당사국들 사이에 개입하지 않고 중도적 입장을 취한다는 외교정책으로 이뤄진다. 스웨덴은 1814년 나폴레옹전쟁 이후, 그러니까 정확히 208년 동안 주변 강대국들의 침공 위협을 견디며 나라를 지켜온 경험이 있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이웃 덴마크·노르웨이와 달리 독일과 소련의 침략을 받지 않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전하며 빠른 경제성장을 통해 1960년대 이후 세계적인 복지국가로 성장한 배경에는 바로 중립 외교정책이 있었다. 성공적 중립 정책은 강력한 국방력과 외교력을 무기로 유지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핵무기 제조를 위해 핵실험실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첨단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항공기, 잠수함, 미사일, 전차, 군함, 통신 장비 등을 스스로 생산할 수 있는 막강한 군사기술력을 갖추고 자주국방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스웨덴과 다르게 핀란드는 러시아와 치른 겨울 전쟁(1939~1940)에서 7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전쟁에 패해 동부 국경 지역을 러시아에 빼앗긴 뼈아픈 역사도 갖고 있다. 이러한 경험 때문에 핀란드는 이후 러시아를 군사적으로 자극하지 않는 중립 외교정책을 채택해왔다. 역대 핀란드 대통령들은 취임하자마자 가장 먼저 러시아의 통치권자들을 예방해 친선 우호 관계 유지를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다. 구소련이 북한을 지원해 벌인 6·25전쟁, 아프가니스탄 침공, 조지아 침공 등 세계적 비난을 받았던 전쟁에 대해서도 핀란드는 러시아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적극적으로 비난하지 않는 정책으로 일관해왔다.
소련과 베를린장벽의 붕괴와 스웨덴의 국방 개혁
스웨덴은 1989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통치하에서 이뤄진 소련 해체와 베를린장벽 붕괴를 목격하면서 유럽에 더 이상 전쟁과 같은 위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렸다. 1991년 경제위기를 겪으며 복지 재정이 위협받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국방비 축소를 정책 최우선에 두고 국방 개혁을 진행해왔다.
냉전 기간 동안 스웨덴 국방비 지출 비율은 국민총생산(GNP) 대비 3% 내외였지만 2015년 기준 1%까지 지속적으로 줄여나갔다. 스웨덴은 1999년 국방 개혁에서 러시아는 더 이상 스웨덴의 적국이 아니라는 정책 변화에 따라 러시아의 콜라반도에 가까운 스웨덴 북부 지역 방어사령부를 축소하거나 해체하고 동부 발틱해에 위치한 중부 및 동해안 방어사령부도 대폭 축소하는 등 신평화 체제에 걸맞은 국방 개혁을 진행해왔다. 징병제 대신 모병제를 도입했으며 러시아와 군사 협력을 강화하는 등의 정책 변화도 꾀했다. 규모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산을 축소하고 비용 절감을 위해 스스로 국방 산업 시설을 폐쇄하는 정책으로 일관해나갔다.
무리한 국방 개혁의 원인
스웨덴은 왜 이렇게 무리하게 국방 개혁을 진행해나갔을까. 1989년 이후 냉전 체제 붕괴라는 국제 정세의 변화도 일조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1985년 이후 채택한 신자유주의적 국제 신용 시장의 개방, 1991년 경제 버블로 인한 재정 위기를 거치며 복지 재정 능력이 위협받자 국가부채 증가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됐기 때문이다. 1996년 예란 페르손 정부는 일시적 복지 축소를 통해 국가부채를 해소하고 장기적 복지 재정의 고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방비 삭감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신냉전 체제에서 한때의 오판과 개혁은 결국 부메랑이 돼 스웨덴의 국방력 약화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국제 정세를 잘못 읽은 1990년대와 2000년대 정치인들의 평화에 대한 오판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영구 평화에 대한 깨진 환상과 대전환 정책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지 12일 만에 두 국가 정상은 전격적으로 헬싱키에서 만나 협상을 시작했다. 논의의 핵심은 양국의 국방력으로 두 나라가 중립 정책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모아졌다. 정세 오판과 성급한 국방 개혁으로 이미 국방력이 상당히 약화돼 있기도 했지만 강대국 러시아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은 곧 파멸이라는 것을 이번 전쟁이 일깨워줬다. 결국 중립주의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한 셈이다.
스웨덴과 핀란드에 대한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에 대처하는 여야 정치인들의 자세와 공조 체제가 인상적이다. 개전 23일 만에 스웨덴은 의회에 진출한 모든 8개 정당이 2차 세계대전 때와 같이 준전시 거국 정권 체제를 구축하고 여야가 함께 안보 위기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때 중립국 포기와 나토 가입 문제까지 포함하는 안보 정책 대전환을 모색하기 위해 특별조사위원회 구성에 동의했다. 3월 21일에는 총리와 야당 대표가 함께 나토 군사훈련에 참가해 진행한 공동 기자회견을 통해 국민에게 안보와 국방 문제로 생겨날 수 있는 국민 갈등을 줄이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여줬다. 핀란드 여야 정당들이 국가의 위기 앞에 의회에서 협치하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우리나라에 던지는 메시지…정치권은 미래 국가 위기에 대처할 능력이 있는가
스웨덴과 핀란드가 보여준 나토 가입 결정 배경과 협상 과정은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선 시대적 오판과 정책 실패는 국가의 위기를 증폭시킨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국방력 강화를 위한 개혁을 지속적으로 진행해 자국 방어 능력을 보유하고 고도의 국방 기술과 무기 체계를 확보하는 것이 필수 조건이라면 독재 강대국의 침략을 억제하는 가치 동맹 강화는 충분조건이다. 더 이상 이상적 평화주의나 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환상을 갖는 것은 금물이다. 중국의 군사화, 동북공정, 한국 역사의 부정에서 보듯 중국은 자국의 이익에 반하거나 하나의 중국 원칙에 대한 도전과 한국에 진출한 중국 기업, 그리고 민간인·학생 보호라는 구실로 언제든지 군사개입이 가능하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핵 개발을 완성해 군사 위협을 강화하고 있는 북한의 오판으로 전쟁이 시작될 수 있는 현실도 직시해야 한다.
‘전쟁이 과연 발발할까’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진짜 전쟁이 발발했을 때’를 대비한 국방력, 가치를 공유하는 미국·일본과의 공동 방위 체계 구축, 핵폭탄 대피 시설 점검, 전시 위성통신 인프라 구축, 생존을 위해 필요한 물과 식량 등 생필품 보급, 전시 에너지 수급 등의 구체적이며 꼼꼼한 준비를 서둘러야 할 때다.
국제정치의 대전환 시대에 여야와 세대·젠더·지역으로 갈린 우리 사회의 갈등을 줄이기 위해 나토 가입을 둘러싸고 스웨덴과 핀란드가 보여준 협치 모델에서 영감을 받아 새 정부부터 실천하고 야당도 화답하는 새로운 정치 개혁을 모색하는 것은 시대적 요구다. 복지와 국방은 국민의 안전·생명·생존과 필연적 관계에 있다는 국민 인식도 중요하다. 국가로부터 더 많은 것을 기대하다가 나라를 잃을 수 있다는 의식의 대전환이 필요할 때다.
최연혁 교수는…
스웨덴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25년 동안 오로지 북유럽 정치를 연구했다. 런던정치경제대에서 박사 후 과정과 UC버클리대 사회연구소 방문연구원, 예테보리대 연구소 객원교수 등 비교 관점에서 정치 변화와 정책 대응을 가까이에서 관찰해왔다. 국가 정책의 대전환이 갖는 의미와 배경, 그리고 그 뒤에 숨은 퍼즐을 찾는 데 필요한 지도자의 역할, 정부 정책의 질, 국가 제도 등을 연구했다. 저서로 ‘좋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와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 ‘알메달렌-축제의 정치를 만나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