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지방선거에서 압승과 참패의 결과를 각각 받아 든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이 2일 똑같이 고개를 숙였지만 양당의 향방은 극명하게 갈렸다.
대승을 거둔 다음날 국민의힘은 ‘혁신’을 앞세워 ‘겸손’하겠다고 약속했고 패배한 민주당은 지도부 총사퇴를 의결하며 사죄의 뜻을 밝혔지만 친문계와 친명계의 갈등과 대립이 분출하고 있다. 두 정당 모두 지방선거 2년 뒤 치러질 총선에 대비해 당을 쇄신하겠다고 했지만 민주당은 패배의 후폭풍에 시달리는 양상이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이날 ‘혁신’을 강조하며 한껏 몸을 낮췄다. 12 대 5라는 대승을 거머쥐고도 ‘혁신’을 통해 2년 후 총선에서도 국민의 선택을 받겠다는 목표를 분명히 내세웠다.
국민의힘 최고위원회에서는 ‘겸손’도 여섯 차례나 언급됐다. 이 대표는 “몰아주신 지지는 저희로서는 너무 감사하고 두려운 성적”이라며 “2020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180석 성과에 도취돼 일방적으로 독주하다 2년 만에 상반된 결과가 나온 것처럼 겸손하게 국민만 보고 일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을 반면교사로 삼겠다는 것이다. 국민의힘은 특히 총선에 대비해 공천과 정당 개혁 등을 담당할 당 혁신위원회를 출범시키기로 했다. 위원장은 전 감사원장인 최재형 의원이 맡게 된다. 이 대표는 “당원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공천에서도 수정할 수 있는 방안들을 연구하는, 정당 개혁을 목표로 하는 혁신위를 출범시키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지방 권력을 거머쥐었지만 여전한 ‘여소야대’ 국면을 해소하기 위해 총선 앞으로 당력을 끌어모으는 모습이었다.
반면 민주당은 ‘친명’계를 향한 ‘친문’계의 집중 포화가 시작됐다. 친문계의 핵심인 홍영표 의원은 “사욕과 선동으로 (민주당을) 사당화한 정치의 참담한 패배”라며 이재명 상임고문과 송영길 전 대표를 정조준했다. 이낙연 전 대표도 가세했다. 이 전 대표는 “‘졌지만 잘 싸웠다’고 자찬하며 패인에 대한 평가를 밀쳐뒀다”고 했고 전해철 의원도 “선거 패배에 책임 있는 분들이 자기 방어와 명분을 만드는 데 집중하면서 국민의 기대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고 쏘아붙였다. 비대위를 해산한 민주당은 당장 리더십 ‘진공’ 상태에 들어가게 됐다. 8월로 예정된 전당대회를 두고도 친명계가 전당대회를 조기에 개최해 리더십 공백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달리 친문계는 대선·지방선거 평가를 통해 패배의 책임을 따지는 것이 우선이라고 밝혀 내홍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6·1 지방선거에서 압승한 국민의힘이 몸을 낮춰 ‘겸손’ 모드를 이어가는 것은 ‘여소야대’의 국회 상황을 돌파해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된다. 지방선거 승리에 도취돼 자칫 국민에게 ‘오만’과 ‘독선’의 행태로 비쳐질 경우 2년 뒤 치러지는 총선에서도 여소야대를 극복하기가 어렵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이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패배한 대선 평가 없이 지방선거까지 참패하며 내홍이 깊어지는 모습이다. 백가쟁명식 당 쇄신을 주장하고 있지만 계파 간 신경전이 치열해지며 오히려 격랑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다.
2일 국민의힘이 공천의 투명성 제고와 정당 개혁을 목표로 한 혁신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선거 과정의 공약 이행 사항을 보고하기 위해 공약실천점검단을 꾸리겠다는 것도 총선에서 국민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했지만 대선 공약인 여성가족부 폐지마저 민주당의 압도적인 의석수로 인해 정부조직법을 통과시킬 수 없자 장관을 임명한 상황이다. 대선과 지방선거의 승리를 바탕으로 총선까지 이겨야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를 추진해나갈 수 있다는 전략적 판단이 지방선거 승리 다음 날 즉각 ‘겸손과 혁신’을 내세운 배경으로 꼽힌다.
실제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이날 열린 당 최고위원회 회의에서 민주당을 우선 언급했다. 그는 “민주당이 지난 2년 전 총선에서 큰 성과를 내고 그것에 도취돼서 일방적인 독주를 하다가 2년여 만에 이렇게 상반된 결과가 나왔다”며 “오직 국민만 보고 일하라는 교훈을 바탕으로 앞으로 일해나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저희에게 쥐여준 큰 권한과 신뢰를 절대 오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2024년 총선에 대한 각오 역시 내비쳤다. 이 대표는 “2년 앞으로 다가온 총선을 대비해서 저희가 혁신과 개혁의 기치를 내려놓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권성동 원내대표도 “이번 지방선거에서 민심은 국정 안정을 택했다”며 “여전히 국민의힘이 국회에서는 야당이지만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든든하다”고 했다. 유권자들이 ‘정권 안정론’에 힘을 실어준 만큼 구체적인 국정 운영 성과를 내놓고 원내 1당으로 발돋움하겠다는 계산이다.
선거에 승리한 여당이 야당보다도 먼저 ‘혁신’을 꺼내든 것도 공룡 정당으로 몸집을 키워 오만의 심판을 받은 민주당을 반면교사로 삼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이종훈 정치평론가는 “국민의힘이 여소야대 국면을 풀어나갈 지혜를 발휘할 때”라고 강조했다. 그는 “지방선거가 끝났지만 입법부의 구도가 바뀐 것은 아니다”라며 “당분간 야당의 혼란상이 이어질 테니 (여당이) 정책을 추진해나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당장 원 구성 협상부터가 난항”이라며 “(선거에서 패배한) 민주당은 법사위원장이 더 절실해졌다. 국회가 공전하지 않기 위해서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의힘이 전략적 겸손과 혁신 모드에 착수한 것과 달리 민주당은 선거 패배의 책임을 물으며 친문과 친명 간 잠복했던 갈등이 분출했다.
이날 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지도부가 총사퇴한 뒤 지도부 공백 상태에 들어간 민주당은 8월 전당대회를 두고 당권을 둘러싼 ‘친문 대 친명’ 간의 대립이 전면화됐다. 당분간 민주당은 박홍근 원내대표가 당 대표 권한대행을 맡아 선거 패배 수습에 나설 예정이지만 전당대회 개최 시기를 두고도 계파 갈등은 멈추지 않을 기세다. 친명계는 ‘이재명 책임론’에 선을 그으며 이재명 상임고문의 당 대표 출마를 추진하고 있다. 당의 리더십 공백을 줄이기 위해 조기 전당대회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지만 친문계는 대선·지방선거에 대한 평가를 통해 책임을 묻고 전당대회를 열어도 늦지 않다고 맞서고 있다.
문재인 정부에서 행정안전부 장관을 지낸 전해철 의원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그는 “누구도 납득하지 못할 변명과 이유로 자기방어와 명분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며 송영길 전 대표와 이 상임고문을 직격했다. 신동근 의원도 “숱한 우려와 반대에도 ‘당의 요구’라고 포장해 송영길과 이재명을 ‘품앗이 공천’했고 지방선거를 ‘이재명 살리기’ 프레임으로 만든 것”이라며 “이재명 총괄선대위원장과 송영길 서울시장 후보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비판했다.
선거 패배 하루 만에 친문계가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해오자 친명계는 이런 움직임을 ‘기득권’으로 규정하고 반격에 나섰다.
친명계 좌장으로 꼽히는 정성호 의원은 “국민의 호된 경고를 받고도 민주당이 기득권 유지에 안주한다면 내일은 없다”며 “사심을 버리고 오직 ‘선당후사’로 단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계파 갈등이 분출하자 당 안팎의 우려의 목소리는 커지고 있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지난해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에 이어 대선과 지방선거까지 3연패에 빠졌지만 쇄신과 성찰은 구호에 그칠 가능성이 높아졌다”며 “당권에 민감한 것은 결국 총선 공천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충청권의 한 중진 의원은 “승리한 여당은 혁신을 이야기하는데 민심의 심판을 받은 지 하루 만에 민주당은 공천을 염두에 둔 당권을 두고 계파 갈등이 표면화되고 있다”며 “이런 식이면 총선에서도 민주당은 대참패를 면치 못한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