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005930) 부회장이 굳은 표정으로 침묵을 지킨 채 유럽 출장길에 올랐다. 지난해 12월 중동 출장 이후 6개월 만의 해외 출장이다. 이 부회장은 현지에서 글로벌 공급망을 점검하고 인수합병(M&A) 가능성을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이날은 29년 전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 선언’을 내놓은 날이기도 하다.
이 부회장은 7일 오전 11시 45분께 김포공항을 통해 전세기를 타고 유럽으로 출국했다. 이 부회장은 네덜란드와 독일, 프랑스 등 3개 국 이상을 방문할 예정이다. 이 부회장은 이날 취재진과 만나 “잘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구체적인 출장 일정과 M&A 계획, 취업제한 규정 위반 논란 등을 묻는 질문에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출장 기간은 18일까지 총 12일간이다. 앞서 법원은 지난 2일 이 부회장이 매주 출석하던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의혹 재판에 2주간 나오지 않았도 괜찮다고 허락했다.
이 부회장은 우선 네덜란드에서 에인트호번에 있는 ASML을 찾아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수급을 직접 챙길 공산이 크다. EUV 장비는 초미세 반도체 회로를 만드는 필수 설비로 파운드리 경쟁력 강화의 핵심이다. 이 부회장은 2020년 10월에도 ASML 본사에서 페터르 베닝크 CEO에게 EUV 장비 공급을 요청했다.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와도 회동할 수 있다.
독일에서는 각종 완성차 업체들과 삼성전자의 오랜 협력사인 지멘스 등을 찾을 가능성이 점쳐진다. 지멘스는 현재 삼성전자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첨단 공정에 설계자동화(EDA) 도구 등을 제공하는 업체다. 지난해 11월에는 △첨단 패키징 적격성 평가 △정전기 방전(ESD) 규정 △클라우드 기반 집적회로(IC) 설계 등까지 지원 범위를 확대했다.
지멘스는 올 2월 인텔의 파운드리 서비스 생태계에도 참여한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이 회사는 인텔에 차세대 시스템온칩(SoC) 설계·제작 등을 지원한다. 지멘스는 2020년 IC 설계를 위한 배치·배선(P&R) 소프트웨어 개발 선두 업체 ‘아바타 인터그레이티드 시스템’도 인수했다. 2016년에도 지멘스 EDA의 전신인 반도체 설계용 소프트웨어 업체 ‘멘토 그래픽스’를 사들였다. 글로벌 공급망 생태계를 확고히 해야 하는 이 부회장 입장에서는 추가 협력의 여지가 큰 기업이라는 얘기다.
특히 독일의 자동차·산업·전력용 시스템반도체 기업 ‘인피니온’이 네덜란드의 ‘NXP’와 더불어 삼성전자의 인수합병(M&A) 유력 후보군이라는 점이 관심사다. 인피니온은 1999년 지멘스에서 분사해 설립됐다. 출장길에는 최윤호 삼성SDI(006400) 사장도 동행했다.
한편 이날은 지난 1993년 6월 7일 이건희 회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 선언’을 선보인 날과 같은 날이라는 점에서도 관심을 끌었다. 이 회장은 당시 독일 출장 중에 임원들을 불러 모아 놓고 “바꾸려면 철저히 다 바꿔야 한다. 극단적으로 말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고 주문했다. 업계에서는 이 부회장의 이날 굳은 표정이 최근 반도체 산업이 처한 엄중함을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