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있게 죽고 싶다" 130만 명이 선택했지만…아직 갈 길 먼 '웰다잉'

2018년부터 '존엄사' 허용으로
22만명 불필요한 연명치료 거부
연내 의향서 작성 150만명 추정
국민 76% "안락사 법제화 찬성"
보다 적극적인 요구 목소리 커져
웰다잉 안전장치 도입 논의 시급


"나 때문에 번거로운 사람이 없어야 한다"


악성 뇌종양으로 1년 여간 투병하다 2018년 5월 별세한 구본무 전 LG그룹 회장은 줄곧 연명치료 거부의사를 밝혔다.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구 전 회장이 임종기에 들어서자 의료진은 가족들에게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등 연명치료를 받을 것인지 물었다. 가족들은 “생전에 연명치료를 원치 않았다”는 뜻을 재차 밝혔고, 고인은 일반 병실에 누워 가족들 사이에서 평온한 죽음을 맞았다. 이듬해 12월 별세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도 존엄사를 택했다. 1년 여 동안 노환을 앓으며 "어차피 가야 할 인생, 의식 없이 연명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뜻을 수차례 밝혔다고 전해진다. 그는 평소 소신에 따라 인공호흡기를 부착하지도, 심폐소생술을 받지도 않은 채 가족들과 함께 생의 마지막 순간을 보냈다.



◇ 연명의료 결정제도 시행 4년 여만에…130만 명 의향서 작성

재계 총수들의 연명치료 거부 소식이 전해지자 존엄사를 선택하는 분위기가 더욱 빠르게 확산했다. 2018년 2월 연명의료 결정제도가 시행된지 4년 3개월 여 동안 130만 8938명이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를 썼다. 건강할 때 연명치료 거부에 관한 본인 의사를 미리 밝혀두는 일종의 서약서다. 올해 2월 류근혁 보건복지부 제2차관도 의향서를 작성했다. 복지부는 의향서 작성자가 연내 150만 명을 넘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올해 5월 말 기준 실제 연명치료를 거부한 사례는 21만 8511명에 이른다.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를 작성해 두지 않았더라도 임종기에 접어든 뒤 담당의사와 함께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하거나, 별도의 서류를 남기지 않은 경우 가족이 결정할 수도 있다. 보건복지부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2020년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층의 85.6%는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반대했다.


연명의료 결정제도는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가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등 의학적 치료 효과 없이 임종 기간만 늘리는 연명치료를 받지 않거나 중단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소극적 의미의 안락사'를 허용하는 이 제도가 도입된 것은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과 2009년 ‘김 할머니 사건’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보라매병원 사건은 의료진이 인공호흡기를 단 환자를 가족의 요구에 따라 퇴원시켰다가 곧바로 숨져 살인방조죄로 처벌받은 사건이다. 일선 병원들은 이 사건 이후 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들의 퇴원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 ‘존엄사법' 제정 후에도 ‘생의 마지막 순간’ 선택할 권리에 대한 갈증 높아

10여 년 뒤 76세의 나이로 식물인간 상태가 된 김 할머니의 가족들이 인공호흡기를 떼어 달라며 소송을 제기하며 사회적 이슈로 부상했다. 당시 대법원이 “질병의 호전을 포기한 상태에서 현 상태만을 유지하기 위해 이뤄지는 연명치료는 무의미한 신체침해 행위로써 오히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해하는 것”이라며 인공호흡기 제거를 허용하자 분위기가 반전됐다. 2016년 1월 연명의료결정법이 국회 본회를 통과했고, 2018년 2월 제도 시행으로 성인이라면 연명치료 여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안락사 및 의사 조력 자살 합법화에 대한 참가자의 태도(%). 사진 제공=서울대병원


보다 적극적인 생의 마감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윤영호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팀이 2021년 3~4월 19세 이상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76.3%가 '안락사 혹은 의사 조력 자살의 법제화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5년 전 조사 당시 안락사 찬성률(41.4%)에 비해 2배 가까이 늘었다. ‘의사 조력 자살’은 의사가 처방한 치명적인 약물을 환자 스스로 복용하는 것을 말한다. 국민 10명 중 8명 꼴로 현행 제도보다 더 적극적 개념의 안락사를 찬성한다는 의미다.



◇ 안락사 법제화보다 ‘광의의 웰다잉’ 사회적 합의 도출 시급

의료계는 안락사 법제화라는 극단적인 개념 보다 '웰다잉(Well-Dying)'을 위한 안전장치를 도입하는 논의가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광의의 웰다잉은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해 호스피스·연명의료 결정과 함께 독거노인 공동 부양, 성년 후견인, 장기 기증, 유산 기부, 인생노트 작성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박중철 인천성모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마지막 순간을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병원에서 고통스럽게 맞이하는 환자들을 접할 때마다 '존엄한 죽음'이 무엇일지 고민하게 된다"며 "환자가 가장 나 다운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의료진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안락사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에 앞서 죽음에 관해 터놓고 대화하고 준비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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