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부에서 벌금형을 결정할 때 양형기준으로 ‘피고인의 경제력’을 고려하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법원 내부에서 나왔다. 이른바 미국형 ‘일수 벌금형’이 국내 실정과는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다.
13일 법조계에 따르면 장태영 서울고법 춘천재판부 판사는 지난 10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양형연구회 제8차 심포지엄에 참석해 “‘재산 비례형 벌금형’ 또는 ‘일수 벌금형’의 도입에 대한 구체적인 제도의 내용은 국민적 합의가 필요한 사항이고 입법정책의 영역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며 사실상 반대 입장을 밝혔다.
총액 벌금제는 법정형의 범위 내에서 피고인에게 일정 금액을 총액 형태로 부과하는 제도이고, 일수벌금제는 피고인의 자산과 1일 평균 수입 또는 1일 평균 수입 만을 기준으로 벌금형의 일수 정액을 정하는 제도다. 현행법상 국내에서는 ‘총액 벌금제’가 유지되고 있으나 벌금형 양형기준 마련을 앞두고 ‘일수 벌금제’를 도입하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이 발의되는 등 관련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장 판사는 “우리 법체계는 ‘총액 벌금형’을 채택하고 있고, 피고인의 경제력을 고려할 수 있도록 정한 명시적인 규정이나 제도는 찾기 어렵다”며 “벌금형 양형기준에 피고인의 경제력을 참작하는 내용을 포함시킨다면 입법이 필요한 사항을 양형기준에서 정한다는 지적이 제기될 수 있다”고 봤다. 그는 미국 연방법원이 도입한 ‘일수 벌금형’의 배경에 대해 “미국 법원이 벌금액 산정에서 피고인의 재정 능력을 고려한다고 판시한 배경에는 ‘과도한 벌금을 부과할 수 없다’고 정한 미국 수정 헌법 제8조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벌금형 양형기준에 피고인의 경제력을 양형인자로 반영했을 때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포함시킬지도 상당히 어려운 문제”라며 “‘경제력’의 명확한 의미와 판단 기준이 제시되지 못한다면 양형심리에 많은 혼란과 부담을 야기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장 판사는 “어떤 기준이 제시된다고 하더라도 법원이 피고인의 경제력을 조사·확인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노력과 비용,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덧붙였다.
이날 심포지엄은 올해 하반기 벌금형 양형기준 도입을 앞두고 구체적 산정 기준 등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다. 현행 벌금형 양형기준은 선거범죄만 마련돼 있다. 이에 따라 양형위원회는 교통범죄를 시작으로 전체 범죄군에 벌금형 양형기준을 마련해나간다는 방침이다.
이날 토론자로 참석한 임재웅 의정부지검 고양지청 검사는 벌금형 대체 사회봉사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임 검사는 “현재 벌금 액수 제한으로 벌금 500만원을 초과하는 미납자에 대해서는 대체형 집행이 불가능한 실정”이라며 “물가상승 및 사회경제의 발전으로 선고되는 벌금형의 평균 액수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점, 경제적 능력은 없는 벌금형 미납자에 대해 노역장 유치를 강제하는 것이 형벌의 비례성 원칙 내지 헌법상 평등 원칙 등에 위배될 소지가 있는 점 등을 고려했을 때 현재보다 폭 넓게 사회봉사 등에 의한 대체형 집행을 허용하는 것도 검토할만하다”고 말했다.
임 검사는 “다만, 소위 ‘황제 노역 사건’ 등 고액 벌금 미납자에 대한 국민의 법감정 등을 고려해 고액 벌금이 아닌 일정 액수 이하의 벌금에 대해서만 제도의 도입을 검토해야 한다”며 “벌금 1000만원~2000만원 이하의 벌금형 미납자로 대체형 집행 제도를 확대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인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