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라빚이 불어나는 것을 보면 1997년 겨울, 외환위기 당시 처절했던 날들이 떠오른다. 과도한 기업부채와 은행의 부실한 대출 관리, 달러 유동성 고갈이 맞물려 위기가 닥쳤다. 이때 30대 그룹 중 16개가 망했다. 6·25 이후 최대의 고난이었다.
당시 재경부 국제금융 심의관이었던 필자는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외화표시 국채 발행 로드쇼를 다녔다. 여기서 외국 투자자들의 신뢰를 끌어낸 중요한 요소는 ‘건전한 재정’이었다. 이들의 관심사는 한국이 위기를 잘 극복해 외화표시 국채를 잘 상환할 지 여부였다. 당시 우리 부채 비율은 8%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32%보다 훨씬 좋았다. 아울러 온 국민이 나라빚을 갚기 위해 금 모으기 운동에 나서는 모습을 보고 많은 투자자들이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 결과 30억 달러 채권 발행 계획이 목표였는데 수요가 100억 달러 이상에 달했다.
하지만 최근의 모습을 보면 이런 재정건전성의 중요함을 잊은 듯하다. 나라빚 증가세가 심상치 않다. 2017년 문 정부 출범 당시 660조 원이던 국가채무가 2022년 1076조 원으로 5년 새 1.6배나 폭증했다. 복지 지출을 과도하게 늘린 데다 코로나19를 명분으로 수차례 추경을 편성한 탓이다. 덧붙여 국가지도자가 국채비율 40%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발언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선진국과 비교해도 오름세가 지나치게 가파르다. 국제통화기금(IMF) 전망에 따르면 2020~2026년 한국의 정부부채 비율은 18.8%포인트 증가한다. 증가폭이 35개 선진국 중 1위다. 반면 동기간 선진국은 평균 4.1%포인트 감소한다. 한국만 역주행 중이다.
한국은 태생적 한계 때문에 남들보다 재정 건전성에 더 신경 써야 한다. 한국은 대외의존도가 높은 소규모 개방경제라 위기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자본유출 방어, 남북통일 대비 등 위험관리 차원에서 재정이 건전해야 한다. 또 비기축 통화국이기 때문에 외국 투자자들의 한국에 대한 신뢰가 중요하다. 기축통화국인 미국 국채는 전 세계가 사서 외환보유고로 활용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게다가 한국은 자원 빈국으로 석유·광물처럼 대외 담보자산이 없어 건전한 재정이 국가신용도의 담보가 된다. 우리는 1997년 위기 때 그 혜택을 톡톡히 누렸다.
물론 지금의 우리 위상은 변방 신흥국 취급받던 과거와 다르다. 국제금융시장에서 한국 국채 대접도 달라졌다. 하지만 자본은 냉정하다. 나라재정이 어렵다는 인식이 퍼지면 앞다퉈 돈을 빼서 한국을 빠져나갈 것이다. 선진국도 얼마든지 위기에 처할 수 있다. 2010년대 유럽 재정위기 때 선진국인 아일랜드, 아이슬란드, 스페인, 포르투갈도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고 산업 구조조정, 대규모 증세, 공무원 급여 삭감을 겪었다.
과잉채무가 초래하는 호황(붐·boom)과 거품붕괴(버스트·bust)의 역사는 반복된다. 외환위기 때 과잉채무의 주체가 기업과 금융권이었다면 이번에는 가계와 정부가 될 수 있다. 역사를 되새기고 건전한 재정, 적정 채무의 중요성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