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스탈린, ‘발트해의 진주’ 리가를 집어삼키다

최호근 고려대 사학과 교수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6월 17일. 소련군이 라트비아를 전격 침공했다. 수도 리가가 점령되고 소련이 조종하는 새 정부가 수립됐다. 한 달 후 라트비아 의회는 소련과의 병합을 결의했지만, 무력에 의한 강제합병이었다. 이로써 라트비아는 기나긴 ‘테러의 시대’에 빠져들었다. 소련의 점령 첫 해에 2만5000 명의 라트비아 지식인이 시베리아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약소국 라트비아의 비극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 직후 히틀러는 라트비아를 인접한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벨로루시와 묶어 오스틀란트(Ostland)라는 괴뢰국가로 만들어버렸다. 나치 치하에서 라트비아의 청년들은 독일군에 강제 징집됐고, 7만 명의 유대인이 살해됐다. 나치 독일의 패망으로 다시 소련에 점령된 라트비아는 혹독한 암흑시대로 접어들었다. 14만 명 이상의 라트비아인이 소련으로 강제 이송됐고, 동시에 소련 지역에서 라트비아로 대규모 이민이 조직됐다. 그 결과 전체 인구에서 라트비아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절반으로 감소했다. 점령과 지배, 민족 엘리트 강제이송과 언어통제, 대규모 이주와 정복지 인구비율 재편. 이 과정은 우리에게 어떤 기시감을 갖게 한다. 러시아가 구소련 시절부터 지금까지 우크라이나 땅에서 보였던 행태와 지극히 유사하기 때문이다. 발트해 연안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소련과 이웃한 죄로 이 과정을 거의 비슷하게 겪었다. ‘에·라·리’로 약칭되는 이 발트해 3국이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도 이와 같은 현대사의 경험 때문이다. 이 세 나라 가운데 라트비아는 한국인에게 친숙한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의 조국이다. 작곡가 칼 다비도프도 라트비아 사람이다. 라트비아는 영토가 작고 인구도 190만 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문화적 전통이 깊은 이 나라 국민이 비극적 역사의 반복을 막기 위해 온 세계에 관심과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우리의 연대 표명이 필요할 때다. /최호근 고려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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