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005930) 부회장이 미래 전략의 핵심으로 ‘기술’과 ‘인재’를 강조한 것은 ‘초격차’ 수준의 기술만이 급변하는 글로벌 시장에서 생존을 담보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됐다. 잠재적 경쟁자인 유럽 주요 사업 파트너들의 기술 확보 수준을 직접 확인하고 돌아온 이 부회장은 한순간의 방심이 돌이키기 어려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경고’를 내부에 각인시켰다.
이 부회장은 18일 귀국 후 취재진과 만나 기술 경쟁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저희가 할 일은 ‘좋은 사람’을 모셔오고 조직이 예측할 수 있는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유연한 문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술력을 갖춘 핵심 인재를 얼마냐 확보하느냐에 따라 미래 경쟁력이 결정된다는 설명이다.
위기에 놓인 글로벌 공급망의 정상화도 중요하게 언급했다. 그는 “한국에서는 못 느꼈는데 유럽에 가서 보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가 훨씬 더 느껴졌다”며 “시장의 여러 가지 혼돈과 변화, 불확실성이 많다”고 우려를 표했다.
이 부회장의 이 같은 고민은 출장 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부회장은 지난달 삼성이 차세대 반도체, 배터리 등 미래 전략 사업에 450조 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뒤 유럽 출장에 나섰다. 미래 계획 수립과 함께 경쟁 국가들의 관련 기술 현황을 점검하러 나섰다는 해석이다.
이 부회장은 7일 출국 후 헝가리에 위치한 삼성SDI의 배터리 생산 거점을 점검하고 독일에서 주요 완성차 업체인 BMW를 방문했다. 전기차로 전환 중인 자동차 업계를 살피면서 배터리 사업의 미래를 점검하는 한편 BMW와의 사업 협력 강화를 모색했다.
네덜란드에서는 마르크 뤼터 총리, 페터르 베닝크 ASML 최고경영자(CEO)를 연이어 만나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의 원활한 공급을 요청했다. ASML은 전 세계적 수요 증가로 공급난을 겪고 있는 EUV 장비를 유일하게 생산하는 회사다. 글로벌 반도체 경쟁에서 EUV 장비 수급이 주요 반도체 업체들의 핵심 과제가 되면서 이 부회장이 직접 ‘장비 확보전’에 뛰어든 것이다.
업계에서는 이 부회장의 진두지휘 속에 삼성전자가 글로벌 선두 업체들과의 장비 확보 경쟁에서 한발 앞서나가게 됐다고 평가했다. 삼성전자는 EUV 장비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ASML과의 협력 강화를 통해 회사가 추진하는 ‘반도체 초격차’를 더욱 확대하겠다는 구상이다.
미래 먹거리 발굴 기회도 중요하게 살폈다. 이 부회장은 벨기에의 유럽 최대 규모 종합 반도체 연구소 ‘아이멕’을 방문해 뤼크 반덴 호브 아이멕 CEO와 만나 반도체 분야의 최신 기술과 연구개발(R&D) 방향 등을 논의했다. 반도체뿐 아니라 인공지능(AI)·바이오·에너지 등 미래 전략 사업 분야 신기술 개발 기회를 모색했다.
삼성전자가 대형 인수합병(M&A)을 예고한 상황에서 이와 관련한 결실도 주목된다. 이 부회장이 이번 출장 중 전장 기업 하만 카돈을 방문했다. 이 부회장은 2016년 이 회사의 M&A를 주도했다. 삼성전자의 가장 최근 M&A이기도 하다. 업계에서는 이 부회장의 하만 카돈 방문에서 향후 추진할 대형 M&A의 아이디어를 찾았을 수 있다고 예상했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차량용 반도체 기업인 네덜란드의 NXP, 독일의 인피니언 등을 인수할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영국의 반도체 설계 자산 기업인 암(ARM)도 인텔 등과 협력해 인수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업계 관계자는 이번 유럽 출장에 대해 “이 부회장이 보유한 글로벌 네트워크의 진가가 발휘된 행보”라며 “미래 경쟁력 확보를 위해 ‘기술 초격차’를 이뤄야 한다는 핵심 목표를 거듭 강조한 것”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