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이 20일 사장단 회의를 긴급히 열어 ‘비상경영’ 체제 전환에 나선 것은 주력 사업에서조차 미래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글로벌 경영 환경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대표적 효자 상품이었던 스마트폰의 글로벌 점유율이 5년째 답보상태이고 주력 사업인 반도체 또한 경쟁 업체들의 거센 추격으로 고전을 거듭하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이 크게 휘청이는 탓에 삼성의 자체적 노력과 관계없이 앞날을 예측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시계 제로’ 상황으로 흐르고 있다. 그나마 체력이 남아 있을 때 미래를 대비하지 못하면 자칫 돌이킬 수 없는 한계점에 봉착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스마트폰도, 반도체도 미래 장담 못한다=이재용 삼성전자(005930) 부회장이 유럽 출장 후 내부에 던진 화두는 ‘지금처럼 잘하자’는 격려가 아니라 ‘비상한 각오를 다져야 한다’는 채찍질에 가까웠다. 8시간 동안 이어진 마라톤 회의에서도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 등 주요 경영진은 회사가 처한 국내외 척박한 현실을 지적하면서 과감한 변화를 주문했다. 회의를 주재한 한 부회장과 경계현 삼성전자 반도체(DS) 부문 사장은 “국제 정세와 산업 환경, 글로벌 시장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원자재 가격이 계속 오르고 있고 국가 간 위기가 고조되면서 글로벌 공급망은 와해될 위기에 놓여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간 전쟁은 이 같은 글로벌 위기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자체적인 경쟁력을 유지하는 정도라면 대외 환경 악화 속에서 천천히 침몰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 부회장도 “(대외 불확실성이) 유럽에서 훨씬 더 크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삼성의 주요 사업 분야에 대한 위기감은 조금씩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대표적 효자 상품이었던 스마트폰의 경우 지난해 시장점유율이 21.0%(스트래티지애널리틱스 수량 기준 조사)로 5년 전인 2016년의 19.2%와 큰 차이가 없다. 유럽 스마트폰 시장(카운터포인트리서치 조사)에서는 올해 1분기 1위(점유율 35%)를 지켰지만 출하량은 오히려 16% 감소하는 등 풀어야 할 과제가 쌓이고 있다. 경쟁사 애플이 여전한 경쟁력을 유지하는 가운데 샤오미·오포·비보 등 중국 업체들의 추격이 거세다.
반도체 사업도 마찬가지다. 전 세계적인 수요 증가로 메모리반도체를 비롯한 주요 분야에서 안정적인 성과를 달성하고 있지만 코로나19로 인한 장기 호황이 막을 내릴 조짐을 보이면서 미래 수익 창출 가능성에 대한 의구심이 높아지고 있다. 시장조사 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D램 PC향 범용제품(DDR4 8Gb)의 평균 고정 거래 가격은 5월 기준 3.35달러로 전월 대비 1.76% 낮아졌다. 지난해 9월 4.1달러였던 D램 가격은 최근 꾸준히 내려가고 있다.
반도체 사업의 새로운 돌파구로 기대했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사업 분야에서도 수율(결함 없는 합격품 비율) 문제 등으로 세계 1위 TSMC와의 격차를 좀처럼 줄이지 못하고 있다. 시스템반도체 역시 2030년까지 세계 1위로 도약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지금으로서는 공염불에 그칠 위기다.
◇초격차 유지하며 미래 먹거리 찾아야=문제가 쌓이는 반면 해결책 찾기는 쉽지 않다. 경영진이 8시간의 장고를 거듭한 이유다. 업계 안팎에서는 삼성이 ‘초격차’ 전략을 유지하면서 기술 경쟁력 확보에 나서는 한편 미래 먹거리 발굴도 지속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날 회의에서 한 부회장은 “기술로 한계를 돌파해 미래를 선점해야 한다”며 강도 높은 기술 확보 투자를 예고했다. 경쟁이 심화하는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결국 경쟁력의 근원인 기술을 강화해야 한다는 얘기다. 위기를 피하기보다 정면으로 부딪치는 정공법을 택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주요 사업 분야의 초격차 전략 유지와 더불어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야 한다는 점에서도 경영진 대부분이 공감했다. 업계에서는 바이오산업 이후 삼성이 신사업을 발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성장 동력 확보가 그룹의 미래를 위한 핵심 과제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부회장이 유럽 출장 중 벨기에의 종합 반도체연구소(imec)를 방문해 인공지능(AI), 바이오, 미래 에너지 등 신기술 개발 현황을 살펴본 것도 신시장 개척을 위한 포석이라는 해석이다.
업계에서는 삼성이 대규모 인수합병(M&A)을 통한 위기 극복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이 부회장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한 공급망 확보, 국가 차원의 정부 지원도 경쟁력 확보를 위한 중요한 과제다.
이경묵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술·인재를 중심으로 한 대응 전략이 적절해 보인다”면서도 “지금은 과거에 비해 최고경영자(CEO)가 방향을 정해도 움직이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에서 전 임직원이 ‘세계 1등’을 위해 한 마음으로 뛸 수 있도록 만드는 게 가장 어려우면서도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