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심한 고통을 겪는 말기 환자에게 의사가 약물 등을 제공해 스스로 삶을 종결할 수 있도록 돕는 일명 '조력존엄사(의사조력자살)' 법안이 국내 최초로 국회 발의되자 의료계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호스피스시설과 인력 확충 등 존엄한 돌봄이 선엄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국호스피스·완화의료학회는 21일 성명을 통해 "최근 의사조력자살의 허용을 골자로 하는 ‘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발의된 데 대해 우려스럽다"는 입장을 밝혔다.
조력존엄사란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는 말기 환자 본인이 희망하는 경우 담당의사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삶을 마무리 하는 개념이다. ‘의사조력자살(Physician-Assisted Suicide)’이라고도 불린다.
앞서 안규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15일 대표 발의한 ‘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은 △말기 환자로서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이 발생하고 있으며 △신청인이 자신의 의사에 따라 조력존엄사를 희망하는 3가지 요건을 모두 갖춘 경우를 조력존엄사 대상자로 규정했다. 조력존엄사를 희망하는 사람은 조력존엄사심사위원회에서 대상자로 결정된 날부터 1개월이 경과하고, 대상자 본인이 담당의사 및 전문의 2인에게 조력존엄사를 희망한다는 의사를 표시한 경우에 한해 조력존엄사를 이행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와 관련 학회는 "존엄한 생애 말기 돌봄이 가능하도록 관심과 지원을 늘리는 것이 우선"이라며 "존엄한 돌봄의 유지에 필수적인 호스피스 시설과 인력의 확충, 치매 등 다양한 만성질환 말기환자의 호스피스완화의료 이용 기회 확대, 임종실 설치 의무화, 촘촘한 사회복지제도의 뒷받침에 대한 실질적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맞이하는 삶을 마무리하는 순간이 외롭지 않고 편안할 수 있도록 지켜주는 것이 사회의 의무이자 책임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전인적인 호스피스 돌봄이 필수적인 요소라고 봤다.
학회에 따르면 2016년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이후 6년이 지나도록 정비되지 못한 채 제자리 걸음이다. 현행 법률상 호스피스 돌봄의 이용이 가능한 질환은 암과 후천성면역결핍증(에이즈), 만성폐쇄성호흡기질환(COPD), 만성호흡부전, 만성간경화에 국한된다. 그마저도 인프라가 부족한 탓에 대상 환자의 21.3%만이 호스피스 돌봄을 받고 있다는 게 학회 측 주장이다.
학회는 "제도적으로 보완되지 못한 진료환경에서 연명의료중단등결정에 관한 절차는 연명의료 미시행의 법적 근거를 남기는 문서 작성 이상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다"며 "법 시행 전 국회와 정부가 약속했던 존엄한 돌봄의 근간이 되는 호스피스 인프라에 대한 투자, 비암성질환의 말기 돌봄에 관한 관심, 돌봄을 뒷받침하는 사회적 제도의 정비 등은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학회에 따르면 2년 넘는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며 말기 환자의 돌봄 현장은 더욱 악화됐다. 말기암 환자를 돌보는 입원형 호스피스 기관 88곳 중 21곳이 코로나 전담병원으로 지정되어 휴업했고, 나머지 기관도 방역을 이유로 가족들의 면회가 금지되며 환자들은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일상 회복이 이뤄지고 있다지만 호스피스기관들의 경우 복구가 더딘 데다 고질적인 인력 및 재정문제로 기관 폐쇄에 이르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학회는 "이번에 발의된 법안은 의사조력을 통한 자살이라는 용어를 조력존엄사라는 용어로 순화시켰을 뿐 치료하기 어려운 병에 걸린 환자가 의사의 도움을 받아 자살하는 것을 합법화한다는 것"이라며 "국회가 다시 한번 의지없는 약속을 전제로 자살을 조장하는 법안이라는 목소리가 높다"고 꼬집었다. 간병 살인, 환자와 가족의 동반자살, 아버지의 간병비를 위해 학업을 포기하는 청년 등 안타까운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는 데 대한 원인 분석과 대책 마련부터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학회는 "자살률 세계 1위의 안타까운 현실에서 의사조력자살의 법적인 허용은 생명경시 풍조를 유발할 위험 역시 내포하고 있다"며 "국회와 정부의 조속한 대책을 요구한다"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