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운송노동조합이 급등하는 인플레이션에 걸맞은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약 30년 만에 대규모 파업에 돌입했다. 영국 철도망의 80%가 멈춰 서며 영국 내 여객과 물류 대란이 예상되는 가운데 파업은 운송 부문에 그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법원과 학교·병원·항공·통신 등 다른 산업 부문 노조도 속속 파업을 예고하면서 인플레이션이 영국 경제를 넘어 사회 시스템 전반을 뒤흔들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로이터통신과 파이낸셜타임스(FT) 등에 따르면 영국 내 13개 철도 회사에서 일하는 철도해운노조(RMT) 소속 근로자 4만~5만 명이 임금과 업무 환경, 해고 문제를 둘러싼 사측과의 막판 협상에서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21일(현지 시간)과 23·25일 일제 파업에 돌입한다.
여객과 물류 대란은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외신들은 이번 파업으로 영국 기차 운행이 80% 감축되고 전체 철도망의 절반가량이 아예 멈춰 설 것으로 분석했다. 로이터통신은 “30년 만에 최대 규모로 벌어지는 이번 파업으로 통근자와 여행객·학생들은 물론 (영국 최대 음악 축제인)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 참석자들에게도 중대한 피해를 줄 것”이라고 전했다. 영국 접객 업계에 따르면 6월 평균 매출을 기준으로 추산할 때 이번 철도 파업으로 레저·연극·관광 산업에서만 10억 파운드(약 1조 5850억 원) 이상의 경제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철도 파업 강행은 궁극적으로 철도 노동자의 일자리를 유지해주는 이용객들을 몰아내는 행위”라며 “파업은 온 나라의 구성원과 기업에 타격을 줄 것”이라고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노조 측은 강경하다. 파업은 최근의 물가 인상에 걸맞은 임금을 달라는 정당한 요구가 무산된 데 따른 결과일 뿐이라는 입장이다. 영국의 4월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이 1982년 이후 40년 만에 가장 높은 9.0%를 기록하면서 철도노조는 7~8% 임금 인상 요구를 굽히지 않고 있다. 영국 정부가 공공 부문에 제안한 임금 인상률은 2~3%다. 영국 노동조합회의(TUC)의 프랜시스 오크래디 사무총장은 “철도 근로자들은 10년 이상 임금이 동결되거나 삭감됐다”며 파업의 정당성을 옹호했다.
노조는 앞서 이번 대규모 파업을 ‘불만의 여름(summer of discontent)’으로 명명했다. 1978년 말부터 1979년 초까지 이어진 영국의 역사적 파업 사태인 ‘불만의 겨울’에서 따온 명칭이다. 당시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임금 인상률을 제한한 정부에 맞서 영국 공공 부문 노조가 단행한 총파업으로 전국의 기차와 버스·지하철 등 교통수단은 물론 병원과 지역 미화원까지 일손을 놓았다. 이때 일반 근로자들의 출퇴근길이 막히고 거리가 쓰레기로 가득 찰 정도로 파업의 직격탄을 맞았다. 철도노조가 이번 파업을 불만의 여름으로 칭한 것은 그때처럼 전 산업 분야에 걸친 대대적인 파업으로 확장하겠다는 의지의 표출인 셈이다.
실제로 철도 분야에서 불붙은 파업은 임금에 대한 불만이 들끓는 다른 분야로도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항공 분야의 경우 브리티시에어의 체크인 담당 직원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이미 파업 찬반 투표를 벌이고 있다. 투표에서 쟁의가 결의되면 여름 휴가철 항공 수요가 몰리는 다음 달에 파업이 시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법원 공판 변호사들도 27일 총파업 결정 투표를 예정했으며 교원노조도 임금을 12% 올리지 않으면 11월 파업을 준비한다는 일정을 밝혔다. 영국의료협회와 통신사, 우체국, 버스, 환경 미화원 등은 이미 이달부터 부분 파업에 들어갔거나 파업을 준비하고 있다. 그랜트 섑스 영국 교통장관이 이날 “노조 간부들이 나라를 1970년대로 끌고 간다”고 비난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한편 유럽 각국에서도 인플레이션으로 사회적 혼란이 일고 있다. 이날 벨기에 근로자 7만 명이 치솟는 물가를 잡고 임금을 올려달라며 대규모 시위를 벌여 브뤼셀 공항이 마비됐다. 프랑스 공항의 지상 근로자들도 생활비 급등에 따른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이달 초에 이어 7월 2일 2차 파업을 예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