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반 미국 남북전쟁 당시 천연두가 창궐하자 남부연합은 인두법에 눈을 돌렸다. 18세기 후반 영국인 의학자 에드워드 제너가 천연두 백신 접종법을 개발했지만 남부에서는 백신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백신 접종은 약한 천연두 바이러스를 사용하는 반면 인두법은 환자의 고름이나 딱지를 사람의 피부에 밀어 넣는 방식이다. 주요 희생양은 흑인 노예 아이들이었다. 아이의 몸에 생긴 물집이 커질수록 다른 사람에게 접종할 더 많은 천연두 림프를 채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흑인 아이의 온몸에는 평생토록 갈 흉터와 파인 자국이 남았다.
신간 ‘제국주의와 전염병’은 제국주의와 노예제도, 전쟁이 현대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오늘날 의료시스템에 어떻게 깊이 각인돼 있는지 추적한 역작이다. 책은 현대 역학(疫學)의 대부분이 18~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노예와 혼혈인, 식민지 주민, 죄수와 군인 등 예속된 사람들의 질병을 관찰하고 치료하고 예방하는 과정에서 발전했다고 말한다.
저자는 짐 다운스 미국 게티즈버그대학의 역사학 교수다. 그는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역사의 이면, 권력의 그림자에 가려져 잊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발굴하고 재해석하는 학자로 유명하다. 책은 1756년 벵골군에 포로로 잡혀 좁은 감방에 갇힌 146명 가운데 불과 23명만 살아남아 훗날 ‘캘커타의 블랙홀’로 불리는 사건으로 시작한다. 18세기 중반만 해도 서양 의사들은 사람이 가득 찬 밀폐된 공간에서 공기가 어떻게 나빠지는지 몰랐다.
의사들은 노예선 브룩스호에 배치된 해군 군의관 토머스 트로터의 보고서에 주목했다. 트로터는 배 밑바닥에 팔과 다리가 묶여 괴혈병으로 죽어나가는 노예들의 사망 원인이 더러운 공기와 신선한 야채·과일 섭취 부족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트로터의 증언은 괴혈병과 산소의 역할 연구에 중대 진전을 가져온다. 하지만 트로터는 논문과 저서에서 ‘아프리카 노예선’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은 채 ‘수많은 사례’나 ‘선박’ 정도로 용어를 얼버무림으로써 제국주의와 노예무역의 폭력성을 은폐했다.
1845년 말 서아프리카 해안의 보아비스타에서 발생한 황열병도 공공 의료 발전으로 이어졌다. 유행병 정체를 알기 위해 파견된 영국 해군 군의관 제임스 맥윌리엄은 섬 주민 100명을 인터뷰해 결국 최초 질병 전파자가 영국 군인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맥윌리엄의 보고서는 역학의 핵심 도구로 인터뷰의 중요성을 부각시켰고 검역 규정 마련과 질병 연구 방법에 기여했다. 의사들은 도시의 위생 상태 개선을 위한 방법을 얻고자 병사와 전쟁 포로들로 가득찬 군대 캠프를 이용하기도 했다.
이처럼 저자는 식민지, 노예제, 전쟁이 전염병을 확산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고 의사들이 이를 관찰하고 대처하는 과정에서 통계, 자료 수집, 예방법·치료법 개발 등과 같은 오늘날 공공보건의 기초가 수립됐다고 말한다. 또 책은 더러운 병원이 오히려 전염병을 확산시키는 증거를 제시하는 등 현대 역학의 기초를 다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19세기 중반 전 세계로 퍼진 콜레라 대유행 등에 이르기까지 의학이 사회·역사적 변화와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아왔는지 탐색한다.
저자는 책에 대해 “자신의 건강, 고통, 심지어 죽음을 통해 의학 연구와 의료지식 발전에 기여했으나 정작 의학 역사에서는 사라진 사람들에게로 초첨을 이동시켜 보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설명한다. 2만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