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삼정·한영·안진 등 국내 4대 회계법인이 최근 경쟁적으로 수익성이 높고 기업 수요가 많은 컨설팅 등 경영 자문 분야를 확대하면서 전통적 업무인 회계감사 영역과 마찰을 빚는 사태가 증가하고 있다. 회계감사는 기업의 자금 배분과 관리가 적정하게 처리됐는지 견제하는 일인 반면 재무 및 경영 전략, 기업 인수합병(M&A)까지 컨설팅하는 경영 자문은 기업이 핵심 고객으로 업무가 충돌할 수밖에 없는 측면도 있어 한쪽이 득세하면 다른 한쪽은 소외되는 일이 빈번한 것이다. 해외의 글로벌 회계법인에서도 이같이 감사 부문과 경영 자문 그룹 간 갈등이 적지 않아 두 사업을 서로 분리하는 것이 낫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23일 회계 업계에 따르면 최근 딜로이트안진은 브랜드 컨설팅 기업인 피알게이트 인수를 확정하며 컨설팅 사업의 강화를 거듭 강조했다. 디지털 전환과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소셜미디어 평판 관리 등에 대한 기업들의 수요에 대응하려 피알게이트를 합병해 경쟁력을 보강할 계획이다. 대우조선해양 분식회계 사태에 연루돼 빅4 회계법인 중 2~3위를 달리다 4위로 미끄러진 안진은 기업 경영 자문에서 역량을 높여 명예와 업계 위상을 회복한다는 전략이다.
안진을 제치고 3위에 오른 EY한영도 쉽사리 자리를 내줄 생각은 없다. 한영은 올 1월 국내 중견 경영 컨설팅 기업인 ‘텐저블플러스’를 인수해 주요 인력을 자사 컨설팅 조직인 파르테논에 합류시켰다. 한영과 안진은 전문 컨설팅사 인수를 발판으로 향후 경영 자문 수익 비중을 전체 매출에서 대폭 높여나간다는 계획이다.
전체 수익 기준 2위인 삼정KPMG는 이미 경영 자문 분야의 수익 비중이 4대 회계법인 중 처음으로 전체의 50%를 넘어 가장 앞서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외부감사인에 관한 법률 개정으로 기업의 회계감사 수요가 강제적으로 늘었지만 그보다 더 많은 비중으로 삼정이 경영 자문 수요를 흡수하고 있어 업계의 주목을 받을 정도다. 삼정은 기업 M&A나 투자 과정을 돕는 딜 어드바이저리 본부를 업종별로 7개 운영하고 있으며 M&A 센터가 이를 총괄해 기업과 투자자를 연결해주고 있다.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전자의 회계감사인으로 명성을 쌓아온 삼일은 2010년 회계법인 중 가장 먼저 컨설팅 기업을 인수하고 관련 사업을 키워왔다. 최근에는 ESG, 가족 경영 기업, 유니콘(기업가치 1조 원 이상인 스타트업), 공공기관 등 영역별 컨설팅 조직을 구축하기도 했다.
대형 회계법인의 사업 영역은 보통 회계감사와 세무, 재무 자문, 컨설팅 등 4대 분야로 구분되는데 재무 자문과 컨설팅 부문의 매출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회계감사는 법적인 뒷받침에도 매출이나 수익이 크게 늘어날 수 없는 구조적 한계를 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감사 부문 회계사들의 불만이 커지고 법인 내에서도 회계사와 컨설턴트 간 갈등이 증폭되는 양상이다. 한영은 지난해 금융회사를 상대로 회계, 세무, 재무 자문,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하는 금융사업본부를 운영하면서 본부장에 처음으로 회계사가 아닌 컨설턴트 출신을 발탁했다. 해당 사업본부에서 감사의 수익 비중이 20%에 불과해 나머지 영역의 시너지를 극대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감사 업무 담당자의 인사와 보상에 금융사업본부장이 일부 관여하면서 공인회계사법 위반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공인회계사법은 감사와 부대 업무에 대해서는 반드시 공인회계사가 담당하도록 하고 있다. 법조계의 한 관계자는 “관리자라 하더라도 직접 감사를 수행할 수 없는 비(非)회계사라면 감사 업무를 하는 회계사에 대해 지휘나 평가를 할 경우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영의 인사를 놓고 한 감사 전문 회계사도 “회계법인이 컨설팅을 통한 매출 증가에 치중해 법인 고유의 업무인 감사 품질이 우선순위에서 뒤처지는 의사 결정 구조를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금융감독원은 이와 관련해 법적으로 문제를 삼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금감원의 한 관계자는 “회계감사의 법적인 책임은 회계법인 대표이사와 해당 감사를 담당한 회계사가 진다”면서 “경영 효율성을 위해 중간 관리자에 회계사가 아닌 사람을 임명했다는 것이 공인회계사법 위반이라고 판단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한영은 “금융산업 특성상 감사와 세무, 재무 자문 등의 협력이 중요해 금융사업본부를 만들었고 본부장은 행정적 지원만 한다”면서 “금융사업본부는 대표이사가 직접 모든 사안을 보고받고 처리하기 때문에 공인회계사법을 위반하지 않는다”고 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