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로 저온살균우유를 도입해 업계 4위까지 오른 ‘파스퇴르유업’ 창업자이자 한국의 대표적인 명문고로 손꼽히는 민족사관고등학교를 설립한 최명재 이사장이 26일 오전 5시 20분에 별세했다. 향년 95세.
1927년 전북 만경면 화포리에서 태어난 고인은 만경보통학교와 전주북중학교를 거쳐 서울대 경영학과의 전신인 경성경제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상업은행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중 택시 기사로 전직했다. 1960년대에 직접 성진운수를 세우면서 기업인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1970년대 중반 이란에 진출해 유럽과 중동을 오가는 물류 운송업도 운영했다.
이때 번 자금으로 환갑이 가까운 나이에 낙농업에 뛰어들어 1987년 강원도 횡성에서 파스퇴르유업을 창립했다. 고인은 국내 최초 저온살균우유를 도입했고 국내 기업 중 최초로 미군에 우유를 납품하며 품질을 인정 받았다.
기업을 키워나가는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파스퇴르유업은 저온살균법을 기반으로 고급 우유의 이미지를 내세우며 마케팅을 펼쳤는데 이 과정에서 다른 우유 회사들이 쓰는 살균법은 영양가가 비교적 부족하다는 주장을 펼쳤다가 소송에 휘말리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고인은 우유 외에도 아이스크림·요구르트·분유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기존 유가공 업체와 ‘우유 전쟁’을 벌인 끝에 업계 4위까지 도약하는 성과를 일궜다.
최 이사장은 파스퇴르가 자리 잡자 오랜 숙원이었던 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1970년대 영국 이튼학교에서 넬슨 제독의 전승기념일 행사 모습을 지켜보면서 세계적인 지도자 양성 교육을 하겠다고 결심한 그는 1996년 파스퇴르유업 공장 옆 127만 ㎡ 부지에 민족주체성 교육을 표방하는 민족사관고등학교를 개교했다. 고인은 파스퇴르를 운영하면서 번 수익금 대부분을 학교 설립과 운영에 투자했다. 그 액수만도 1000억 원에 달한다.
그는 민사고 설립 초기 직접 교장으로 취임해 교육을 이끌기도 했다. 최 이사장의 목표는 크게 두 가지였다. 세계적인 지도자를 양성하고 선조의 얼을 고스란히 계승 발전시킬 수 있는 민족적 정체성을 가진 인재를 만들어내는 것. 이런 포부를 전하기 위해 그는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조국과 학문을 위한 공부를 하고 출세가 아니라 소질과 적성에 맞는 진로를 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인의 교육 이념은 민사고 건물에도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민사고 정문에 세워진 충무공 이순신과 다산 정약용의 동상, 미래 민사고 출신이 받을 ‘노벨상 좌대’가 이를 잘 보여준다. 학생들 역시 우리의 뿌리를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개량한복을 입고 생활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부모를 대신한 교사에게 예를 갖춰 문안 인사를 드리고 있다.
고인은 생전에 “나는 장사꾼이다. 기왕 장사를 시작한 바에는 큰 장사를 하려고 한다. 창조적인 천재 한 사람이 수백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 한다”면서 “학교를 만들고 영재를 교육해 장차 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하게 한다면 나로서는 수천·수만 배 이익을 얻는 셈이 아니겠는가”라는 말을 자주 했다.
민사고 운영이 쉽지만은 않았다. 민사고는 애초 한해 30여 명만 선발해 기숙사를 포함한 모든 교육을 무상으로 제공했다. 하지만 파스퇴르의 부도로 인해 이내 재정난에 부딪혔다. 교사들이 나서서 무상으로 교육을 제공하고 학부모들이 기숙사비를 자진 납부하면서 어렵게 학교 운영을 이어갔다. 다만 문재인 정부의 자사고·외국어고 폐지 방침에 따라 민사고도 일반고로 전환될 상황에 처했다.
파스퇴르유업은 IMF 사태로 위기를 겪으면서 1998년 10월 부도 처리됐고 이후 2004년 한국야쿠르트에 매각됐다가 다시 롯데삼강(현 롯데푸드)에 인수됐다. 최 이사장은 2004년 회사 매각 후 경영에서 손을 떼고 민사고 운영에만 주력했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2남 2녀가 있으며 장남인 최경종 민사고 행정실장이 고인의 유지를 이어 학교 운영을 맡고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되며 발인은 28일 6시 20분이다. 같은 날 9시 민사고 체육관에서 학교장 영결식이 거행된다. 장지는 고인의 뜻에 따라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민사고가 자리한 덕고산 자락에 마련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