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정부는 모두 재도전 정책 활성화에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재기지원 분야 권위자인 한정화 한양대 현 명예교수를 중소기업청장으로 임명하는 등 재창업자금 지원 사업을 활성화시키는데 기여를 했습니다. 문재인 정부 역시 재도전 활성화에 각별한 애정을 쏟았습니다. 사회적 분위기 조성을 위해 실패 박람회를 정부 합동으로 매년 개최한 데 이어 임기 초인 2018년 금융위원회와 중소벤처기업부 등이 관계부처 합동으로 7전 8기 재도전 정책을 별도로 발표했을 정도입니다.
신용회복 지원 등 실패 기업인을 향한 주홍글씨 삭제와 재도전 기업을 위한 금융 문턱 완화는 정부가 가장 역점을 기울여온 분야입니다. 기업인들의 고충이 그만큼 가장 컸던 분야이기도 합니다. 한번 실패했다는 이력은 평생 기록으로 남아 기업인들의 발목을 붙잡고, 무엇보다 제도권 금융기관의 이용을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여전히 현장에서는 정책 효과를 느끼기 어렵다는 하소연이 적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유는 무엇일까요.
먼저 문재인 정부에서 야심차게 도입한 재기지원펀드를 살펴보죠. 재기지원펀드는 사채나 2금융권이 유일한 자금 확보 통로였던 기업인들에게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습니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김경만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10월 한국벤처투자로부터 제출받은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11개 펀드 3,305억 원 규모로 조성된 재기지원펀드는 총 282개 기업에게 2,612억 원이 투자됐습니다.
재기지원펀드는 (1)폐업 사업주, 대표이사 또는 주요주주였던 사람이 재창업한 기업 (2)정부의 재창업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해 지원을 받은 실적을 보유한 중소기업 (3) 본인 명의 융자의 원금상환 연체, 연대보증 이력이 있는 중소기업 등 3가지 조건 중 하나를 충족하는 중소벤처기업에 투자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주목할 점은 재기지원펀드의 주목적 투자에 부합하는 투자금액은 1,886억 원으로 총결성액(3,305억 원)의 57%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정부가 재기지원펀드의 주목적 투자비율을 60%까지 낮춰준 결과입니다. 즉, 전체 펀드의 40%는 재도전과 무관한 분야에 쓰도록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이에 도입 초기부터 공적 자금을 투입해 펀드 운용사의 배만 불려주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투자를 받은 282개 기업을 전수조사해보니 중소벤처기업부 재창업자금 지원사업을 받은 실적(2)을 보유한 중소기업에게 투자가 이뤄진 사례는 5건(1.8%)에 그치는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원금 연체와 연대보증 이력 등이 있는 기업(1)에 투자가 이뤄진 경우도 2건 밖에 없었습니다. 재기지원이라는 정책 목적을 달성하고 정책 간 시너지 효과를 내려면 정부의 재창업 자금을 지원(보증/융자)받은 기업 중에서 성장잠재력이 있는 곳을 엄선해 후속 투자가 연계되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던 것입니다.
중소벤처기업부가 매년 500~700개 업체를 엄선해 저리로 융자해주는 재창업자금 지원사업은 재도전 기업인을 위한 ‘시그니처’ 사업으로 불립니다. 낮은 신용도 등의 이유로 일반 금융권 이용이 어려운 만큼 어지간한 재도전 기업인들이라면 해당 사업을 신청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만큼 경쟁도 치열합니다. 그런데 이런 검증된 회사조차도 펀드 투자에서는 일제히 배제가 된 것입니다.
주목적 60%에 해당하는 투자금 대부분은 ‘(1) 폐업 사업주, 대표이사 또는 주요주주였던 사람이 재창업한 기업’에게 돌아갔습니다. 여기에 디테일의 함정이 있습니다. 정부는 폐업한 회사의 전직 대표이사나 주요 주주 출신이 최고기술책임자(CTO)나 주요 주주로 있는 회사도 재창업 기업으로 분류, 주목적 투자대상에 포함되도록 규정했습니다. 쉽게 말해 이미 망한 회사의 전직 대표나 임원이 특정 회사의 임원으로 재직하고 있으면 그 회사는 재도전 기업으로 분류돼 투자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재도전 기업의 범위를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자의적으로 설정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배경입니다. 재도전 펀드라고 불리지만, 정작 수혜를 본 재도전 기업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재기지원 펀드를 운용했던 주요 벤처캐피털들의 임원을 만나 속사정을 들어봤습니다. 재기지원펀드 도입은 분명 바람직한 시도였지만 여러모로 개선이 필요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재창업지원자금에 선정된 기업들이 정부가 선별한 업체라고 하지만, 우리 같은 VC에서 투자하기엔 너무 영세하고 제조업이 많아 꺼려질 수밖에 없다. 한 펀드 운용사가 1~2억씩 투자해 100개 업체를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0~20억원의 금액을 한 회사에 투자해 총 10개 안팎의 회사를 관리하는 게 훨씬 합리적이다. 많은 재도전 기업들이 혜택을 누리지 못한 이유다”
”VC도 결국 수익을 남겨야 한다. 재도전 기업만을 대상으로 하는 주목적 투자는 리스크가 큰 만큼, 우리 입장에서는 주목적 투자 비율을 낮춰달라고 요구할 수밖에 없다. 실패 기업인이 직접 재창업한 경우만 한정하면 실적으로 투자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실패 기업인이라는 사회적 낙인이 여전히 강고하게 작동한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습니다. 주홍글씨를 해소하겠다는 정부의 외침과 다르게 실질적으로는 정책금융기관이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이어가는 경우도 여전합니다. 한국벤처투자는 2019년 이후 이해관계인 포함 대상을 기존 ‘등기임원 및 최대주주’에서 ‘대표이사 및 최대주주’로, 책임 범위는 ‘모든 과실에 대해 회사와 연대책임’에서 ‘이해관계인의 귀책 사유가 있는 과실’로 변경했다고 국회 등에 공식 밝혔습니다.
이해관계인은 사실상 연대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광범위하게 설정하면 연대보증 사슬을 채우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회사가 사정이 어려워지거나 사소한 조항만 위반해도 이해관계인에게 특별상환과 주식매수청구 등이 이뤄지는 것이 비일비재한 만큼 여러 명이 아닌 최대주주 1명만 설정하는 것이 옳다는 사회적 분위기를 수용한 것입니다.
하지만 2019년 이후에도 과거의 관행을 유지한 사실이 취재 결과 발견됐습니다. 양금희 국민의힘 의원실에 따르면 한국벤처투자는 2019년 이후에도 3명 이상의 이해관계인을 설정한 사례가 여러 건 발견됐습니다. 한국벤처투자는 관련 사항에 대해 정보 공개를 극도로 꺼리고 있습니다. 실질적으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사례가 있을 것이라는 추정이 나오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