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장과 공공기관·공기업의 장에 대한 공모제는 모두에게 기회를 공정하게 부여하고 투명하게 선발하고자 김대중 정부가 도입한 제도로 이제 20여 년이 지났다. 하지만 지금의 공모제는 코드 인사, 낙하산 인사를 합리화하는 편의적인 제도로 시간과 비용·절차만 늘어났을 뿐 임명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후보를 공개 모집하지만 실은 이미 1명을 내정해 나머지는 들러리인 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이렇게 ‘짜고 치는 판’에 무림의 고수들은 지원을 기피한다. 이들의 외면은 우선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고수들 특유의 성향과 설혹 출사표를 던진다 해도 공정한 평가가 이뤄진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공모제는 그간 ‘무늬만’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런 왜곡된 공모제의 실상은 3년여 전 어느 문화기관장 공모에서 절정을 이뤘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서류 전형을 통과한 이들에게 예외적으로 역량 평가를 면제해달라는 요구를 인사혁신처에 했다. 공고에도 없던 일이다. 특정인을 위한 조치라는 여론에 밀려 다시 역량 평가를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문체부의 예상대로 ‘그’가 탈락해 임명권자를 당혹스럽게 했다. 그러자 인사혁신처와 문체부는 곧 재시험, 즉 역량 평가 기회를 다시 줬다. 그간 족집게 과외라도 받았는지 ‘그’는 보름여 만에 역량 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그’는 첫 평가에 합격했던 다른 이를 밀어내고 당당하게(?) 기관장에 취임했다. 이렇게 공모제는 소위 ‘화이트리스트’를 실행에 옮기는 제도로 정착(?)했다. 3년 임기가 끝나자 ‘역대 두 번째 최악의 기관장’이란 세평과 ‘갑질에 대한 노조의 문제제기’ 때문인지 연임이 불발됐다. 연임하면 임기가 1년 연장되었을 터다. 그런데 재공모를 통해 임기 3달도 안 남은 정부는 그를 3년 임기의 관장으로 또다시 선발했다. 연임이 불가하다는 결정을 번복한 알박기였고, 이 과정에서 새로 공모했음에도 전직이라는 이유로 그의 약점인 역량평가를 면제해 주었다. 그는 결국 무늬 뿐인 공모제의 ‘끝판왕’으로 등극했다.
공모제가 낙하산·코드 인사를 정당화하는 ‘꼼수’라는 사실은 세상이 다 안다. ‘공정’과 ‘기회 균등’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이제 공모제는 ‘적폐’가 됐다. 공모제 심의위원 선정도 ‘웃프다’. 중앙·지방정부 공히 심의위원은 공모로 정한다. 이력서·학위·경력증명서를 갖춰 응모하라니 응할 사람은 거의 없다. 응모해달라는 담당자들의 간청에 마지못해 응하지만 이해 충돌 방지를 위한 학연·지연·사제 등 배척 사유로 정작 해당 분야에 성과나 업적이 미미한 이가 결국 심의위원이 된다. 국가대표 축구선수를 동네 축구선수나 다른 구기 종목 선수가 뽑는 셈이다. 만능의 공모제는 시상에도 적용된다. 문화 예술 발전에 기여한 기업, 기업인을 발굴해 시상하는 메세나 대상의 후보가 되려면 스스로 공적서를 작성해 스스로를 ‘발굴’하거나 추천 받아야 한다. ‘나 이런 선행을 했소’라는 자진 신고가 아니라 왼손도 모르게 문화 예술 활동을 지원해온 이를 발굴, 시상하는 것이 목적일 텐데.
게다가 무늬만 공모제를 통해 임용된 ‘깜’도 안되는 이가 정치적으로 임명된 정무직과 다르게 임기를 이유로 자리 보전을 주장하는 행태나 정권 바뀌었다고 말 바꾸는 처세술의 달인인 걸 보면 공모제를 대신할 제도를 공모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편법으로 자리를 차지한 기관장이 그간 행한 행정행위의 법적 효력은 과연 있는 것일까. 책임 있는 기관의 유권해석을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