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정치 가문 황태자·최장수 총리…과거사·수출 규제로 韓과 마찰

■'피격 사망' 아베 전 총리는 누구
'아베노믹스'로 日경제부흥 노려
평화헌법 개정 추진 '극우본색'도

로이터연합뉴스

8일 참의원 선거 지원 유세 도중 피격된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2006년 9월~2007년 9월과 2012년 12월~2020년 9월 두 차례에 걸쳐 총리를 지내며 역대 최장수 재임 기록을 세웠다. 일본 경제의 부흥을 노린 ‘아베노믹스’와 재임 기간 중의 극우 행보로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일본 정치계의 거물이자 보수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1954년 출생인 아베 전 총리는 정치 명문가 출신의 세습 정치인이다. 외할아버지는 A급 전범 용의자이자 1957~1960년 총리를 지낸 기시 노부스케이며 기시 전 총리의 동생이자 아베 전 총리의 종조부인 사토 에이사쿠는 1964~1972년 총리를 지냈다. 친할아버지인 아베 간은 중의원을 지냈으며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는 외무상을 했다. 친동생인 기시 노부오는 현 방위상이다.


1993년 중의원에 당선돼 정치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인 아베 전 총리는 2002년 관방장관, 2003년 자민당 간사장을 거쳐 2006년 자민당 총재로 등극했다. 관방장관이던 당시에는 ‘납치의 아베’라고 불릴 정도로 북한의 일본인 납치 사건에 강경한 태도를 보여 인기를 끌었으며 덕분에 2006년 역대 최연소 총리로 취임했다. 하지만 5000만 건에 달하는 국민연금 납부 기록을 분실하는 일명 ‘사라진 연금’ 사건으로 국민적 분노를 얻으며 선거에서 참패한 데다 건강 문제까지 불거져 1년여 만에 사퇴했다. 이후 다시 자민당 총재에 오르며 2012년 총리로 화려하게 부활한 그는 2020년 지병인 궤양성 대장염 재발을 이유로 사임하기까지 1차 집권기를 포함해 총 8년 9개월간 총리로 재임하며 최장수 총리라는 역사를 썼다.






극우 성향의 아베 전 총리는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강행하고 평화헌법 개정을 추진해 주변 국가들로부터 반발을 사기도 했다. 특히 2015년 가진 종전 70주년 담화에서는 참전을 반성한다면서도 동시에 “전후세대가 더 이상 사죄할 필요가 없다”고 밝혀 논란을 일으켰다. 재임 중 개헌에는 실패했지만 동맹국들과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가능하게 하는 안보법제를 도입하고 이후 평화헌법에 대해서도 같은 취지의 유권해석을 내리면서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가 가능하도록 했다. 집단 자위권은 동맹국 등이 공격받은 경우 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반격하는 권리다. 그는 퇴임 후에도 ‘육해공군이나 기타 전력을 보유하지 않는다’고 규정한 일본 헌법 9조 2항에 자위대의 존재를 명기하도록 개정하는 것이 “정치가로서의 책임”이라고 밝히며 필생의 과업으로 꼽기도 했지만 이를 완수하는 데는 실패했다.


아베 전 총리는 2기 집권 당시 △대대적인 양적완화 △재정지출 확대 △민간 투자 촉진을 골자로 하는 자신의 경제정책, 일명 ‘아베노믹스’를 앞세워 잃어버린 20년이라 불리는 장기간의 디플레이션으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했다. 재정지출을 통한 유동성 확대로 경기를 회복시키는 동시에 엔화 약세를 유도해 수출과 기업 이익, 주가를 끌어올리며 이 과정에서 투자가 늘어나 임금과 소비가 증가하는 선순환 구조로 이어질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다만 아베노믹스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아베 전 총리 재임 시절 달러 대비 엔화 가치가 20% 이상 절하되는 등 엔고에서 벗어나면서 수출 경쟁력이 회복되고 기업들의 수익성과 고용시장이 대폭 개선됐다는 평가를 받는 한편으로 돈 풀기에만 급급해 국가채무비율이 급증했으며 민간 투자도 크게 늘지 않았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디플레이션 탈출에도 끝내 실패해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아베 전 총리는 재임 시절 과거사 문제로 한국과 번번이 부딪히면서 한일 관계를 악화시켰다. 일본군 위안부와 징용 노동자를 강제로 연행한 증거가 없다고 부인했으며 한국 대법원의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국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로 보복해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독도에 대해서도 “역사적으로도, 국제적으로도 일본의 고유 영토라는 것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며 영유권을 주장하는 등 망언을 내뱉었다. 그의 이 같은 행보는 일본 내 반한 감정을 이용해 보수를 결집시키려는 노림수로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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