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금보장 옵션 포함돼 취지 퇴색 우려…"75% 쏠린 日전철 막아야"

[연금부자 시대온다] <하>
◆기대 반 우려 반 '가입자 선택형' 디폴트옵션
韓·日, 퇴직연금 선진국과 달리
개인이 상품 정하는 단계 추가
투자 결정 지원 기능 약화 가능성
日 75% 원금형 선택, 수익률 낮아
"운용업계도 가입자 교육 나서야"


퇴직연금 시장의 판을 바꿀 것으로 거론되는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옵션)가 이달 마침내 시행됐지만 업계에서는 아직 기대와 우려가 공존하고 있다. 연 1~2%대에 머물고 있는 퇴직연금 수익률을 끌어올리기 위한 첫발을 내디뎠다는 점에서는 고무적이지만 제도의 도입 취지를 퇴색시키는 몇몇 설계로 인해 기대 이하의 효과를 내는 유명무실한 제도로 전락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도 나온다.


◇‘가입자 선택형’ 디폴트옵션…적극적 운용 가능할까=우선 거론되는 것이 한국의 디폴트옵션은 세계에서도 유례없는 ‘가입자 선택형’이라는 점이다. 선진국의 퇴직연금 디폴트옵션은 대부분 가입자가 자신의 선택권을 어느 정도 제약하는 방식으로 설계됐다. 특히 디폴트 값으로 운용될 상품은 가입자가 직접 고르는 것이 아니라 연금 사업자와 사용자(회사), 근로자 대표 등이 협의해 결정한다. 개인에게 직접 운용을 맡겨보니 △이익보다 손실을 강하게 인식하는 ‘손실 회피 성향’과 △먼 미래에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지나치게 저평가하는 등의 행동경제학적 결함 등으로 20~30년 장기 투자해야 하는 퇴직연금을 적극적으로 운용하지 않더라는 사실이 여러 연구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연금 강국으로 꼽히는 미국이 대표적이다. 미국은 근로자가 입사한 후 90일 이내에 별도의 의사를 밝히지 않을 경우 사용자가 제공하는 금융 상품으로 퇴직연금이 ‘강제로’ 운용되도록 제도가 설계됐다. 회사가 개별 근로자의 퇴직연금을 굴릴 상품을 대신 고른 셈이지만 적격 상품이기만 하면 손실이 나더라도 회사가 책임지지 않는 면책 조항이 들어가 있다. 또 미국 기업들은 통상 하나의 펀드만을 적격 상품으로 제공한다. 근로자들의 선택권을 상당히 제한하는 듯 보이지만 일각에서는 이런 강제성이야말로 가입자의 연평균 수익률을 6~8%까지 끌어올린 핵심 원동력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가입자 개인이 반드시 한 번은 선택해야 하는 단계가 추가됐다. 미국과 달리 면책 조항이 없어 손실이 날 경우 회사의 책임론이 불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석훈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가입자에게 투자 상품의 최종적 선택을 요구하는 것은 선택권을 보호한다는 의미는 있겠지만 투자 선택에 어려움을 가진 이들의 의사 결정을 지원하는 디폴트옵션 본연의 기능은 오히려 약화될 수 있다”며 “정부는 제도를 시행하면서 이러한 방식에 따른 문제점과 개선할 점들을 잘 살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원금 보장형 포함…일본 실수 되풀이하나=원리금 보장 상품이 디폴트옵션 상품에 포함된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적립금 대부분이 저리의 예금 등에 묶여 있는 문제를 풀기 위해 디폴트옵션을 도입했는데 적격 상품에 원금형 상품이 다시 포함되면서 제도 도입의 취지 자체가 무색해진 것이다. 제도 시행 초기 원금 보장형 상품의 쏠림 현상이 유지될 가능성도 높다는 관측이다.


이에 일본의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일본 기업기금연합회가 올해 발간한 ‘2020 확정갹출(DC)연금 실태 조사’ 자료에 따르면 디폴트옵션을 도입한 일본 사업장의 75.7%가 지정 운용 방법으로 원금 보장형 상품을 선택했다. 일본 DC형 퇴직연금 수익률은 글로벌 증시가 급등했던 2020년(4.3%)을 제외하고는 연 0.6~2.3% 수준에 그치고 있다. 금융 투자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런 가입자들을 위해 ‘옵트아웃(Opt Out·적용 제외)’ 제도를 마련해둔 상황인데 굳이 디폴트옵션 적격 투자 상품에까지 원리금형 상품을 포함해 6주 후 저리의 예금으로 자금이 이동하도록 설계한 것은 비합리적”이라고 말했다.


한편 연금 가입자들이 원금형 상품 중심으로 디폴트옵션을 설정하는 일을 막는 것은 자산운용 업계에 달렸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미국 퇴직연금 시장에서 타깃데이트펀드(TDF) 등의 펀드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배경은 TDF가 중장기적으로 높은 수익률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라며 “장기 투자에 적합한 상품을 개발하는 한편 가입자 교육 등을 통해 투자 상품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고쳐나가는 것도 업계가 해결해야 할 숙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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