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전통은 지나간 옛것에서 찾아낸 가치라는 점에서 태생적으로 ‘과거’를 품고 있다. ‘고고학’ ‘유물’ 등도 마찬가지로 과거적 단어다. 이런 것들에 미래를 접목한다면 모순된 것들의 결합에서 획기적인 새로움이 탄생한다. 지난해 5월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서 개관한 ‘조선팰리스’가 그런 곳이다. 서울에서도 가장 현대적 도시 풍광을 가진 테헤란로를 옆에 끼고 500년 된 조선 왕릉인 선릉을 내려다보는 곳에 자리 잡은 장소성부터 범상치 않다. 차로 도착해 주차장에서 나오든, 지하철 역삼역이나 선릉역에서 들어오든 조선팰리스 입장객이라면 반드시 지하 1층의 전용 입구를 거치게 된다. 별무리처럼 천장을 채운 조명이 과하게 밝지 않아 우아한 품격을 한껏 끌어올린 정문을 통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웰컴 로비에서 새로운 만남이 시작된다.
대단한 위엄이다. 신세계(004170)그룹의 조선호텔앤리조트가 최상급의 독자 브랜드로 개발한 최고급 호텔의 수문장답다. 미국 작가 대니얼 아셤의 2019년작 ‘풍화된 푸른 방해석 모세상(Blue Calcite Eroded Moses)’이다. 의자에 앉고도 높이가 260㎝에 달하는 거구다. 근육이 우람하지만 살결은 매끈한 몸, 구불거리는 머리칼이 가슴팍까지 닿는 수염을 지나 무릎까지 덮은 옷 주름으로 이어지는 유려한 아름다움이 탁월한 조각상이다. 이뿐이었으면 박물관에서 만나는 평범한 ‘옛것’이었으리라. ‘모세상’의 벗겨진 피부 아래로 희고 푸르스름한 수정들이 반짝인다. 고고학 발굴 현장에서 땅을 파고 흙을 살살 걷어내다 찾아낸 귀한 유물을 마주한 것과 같은 쾌감이 느껴진다. 이 ‘모세상’의 원본은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유언에 따라 묘당을 꾸미기 위해 1513년부터 제작해 로마 산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 설치한 조각이다. ‘피에타’ ‘다비드’와 함께 미켈란젤로의 3대 조각으로 꼽힌다.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의 계시와 함께 십계명이 적힌 석판을 들고 마을로 돌아온 모세가 금송아지를 놓고 절하는 유대인들을 노려보며 노여워하는 모습을 포착했다. 모세의 정수리 쪽에 뿔이 솟아 있는데 히브리어로 적힌 성경 구절을 뿔이라 번역하는 이도 있고 빛이라 번역하는 경우도 있다. 어쨌거나 그 솟아난 영험함이 모세를 신성한 존재로 부각시킨다. 아셤의 모세상은 미켈란젤로의 것과 크기도 똑같다. 다만 오른손에 든 십계명 석판도 뜯긴 한쪽 귀퉁이에서 수정이 삐죽이 자라나 있다. 이마 쪽에서 자라난 수정은 모세의 시선과 정확히 일치하며 호텔 엘리베이터홀 쪽을 향하고 있다. 헛된 가치를 좇지 말라고, 근본적인 고귀함이 무엇인지 되새겨보라 일깨우는 듯하다. 이처럼 아셤은 500년 전의 고전 조각을 차용하되, 옛것 안에서 돋아나는 새로움을 강조한다. 오래된 새것이요, 새로운 옛날이다. 작가는 이것을 ‘미래의 유물’이라 부른다. 현대 한국의 황금기를 보여주며 낙관적인 미래를 펼쳐 보이고자 한 ‘조선팰리스’의 공간 콘셉트와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1980년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태어난 아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팔로어만 130만 명에 이르는 예술계의 슈퍼스타다. 12세 때 허리케인이 마을을 뒤엎고 건물을 찢어놓는 것을 목격했다. 견고할 줄 알았던 땅과 집이 허망하게 파괴된 장면이 훗날 그의 작업으로 이어졌다. 남미 이스터섬의 고대 모아이 석상을 보고서 우리가 사는 현재도 언젠가 과거가 될 것이라는 생각과 만나 아셤의 세계관인 ‘허구의 고고학(the Fictional archaeology)’이 탄생했다. 카세트플레이어·공중전화·구형카메라·영사기 등 아직은 존재하지만 머지않아 사용하지 않게 될 물건들을 석고로 만들어 화산재 아래에서 발굴한 것처럼 설치 작업을 선보였고 2020년의 개인전 제목에 ‘3020’이라고 적어 현재의 관람객을 미래로 보내기도 했다. 결국 현재가 ‘미래의 과거’라는 의미였다.
그 독특함에 명품 브랜드들이 열광했다. 디올과 협업해 스니커즈와 가방을 제작했고 티파니와는 티파니블루에 영감받아 한정판 청동 상자를 만들기도 했다. 포르쉐의 러브콜을 받아 ‘대니얼 아셤 포르쉐 911’을 선보였고 아디다스·스톤아일랜드 등 다양한 브랜드와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했다. 명품 브랜드는 공통적으로 고유한 헤리티지(유산)를 간직하고 있다. 오래 살아남은 특별한 가치가 있으며 더 오래 아마도 영원히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에 아셤의 ‘오래된 미래’는 더없이 매력적이다. 조선팰리스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모세상’의 첫인상이 너무나 강렬해 맞은 편의 작품을 놓치기 쉽다. 고대 에트루리아 유물로, 루브르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아라 파시스 오귀스트 황제의 행렬’이라는 건축 부조 조각을 모티브로 제작된 ‘풍화된 석영 아라파시스(Quartz Eroded Ara Pacis)’다. 아이들을 포함해 9명의 인물이 줄지어 걸어가는 형상인데 구석구석 팬 부분에서 도드라진 수정들은 어느 것 하나 같은 방향 없이 제각각이다. 덧없이 바스라질 시간들을 살아가지만 인간 개개인의 속성은, 그들이 만들어갈 미래는 뚜렷한 개성을 갖는다고 외치는 듯하다.
이곳 호텔에는 약 400여 점의 작품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진짜 로비는 리셉션이 있는 25층이다. 은박 위에 검은 점들로 그려진 국화와 번쩍이는 황금색의 구슬들이 조화롭게 빛나며 방문객을 맞는다. 현재 서울시립미술관과 덕수궁 연못에서 작품을 만날 수 있는 프랑스 미술가 장미셸 오토니엘, 벨기에 출신의 도예가이자 미술가인 요한 크레텐의 작품이다. 이들의 절묘한 조화는 파인다이닝이 위치한 36층의 중식당인 ‘더 그레이트 홍유안’에서도 만날 수 있다. 전망 좋은 위치를 차지한 쌍둥이 같은 두 방의 한 쪽에는 오토니엘, 또 다른 쪽에서는 크레텐의 작품이 걸려 있다. 은빛과 금빛의 교차 사이로 풍요로움과 낙관적인 미래가 넘나드는 느낌이다.
이들과 함께 폴란드 출신 작가 폴 빅의 기하학적인 부조 작품들이 걸려 있다. 이 호텔에서는 유난히 빅의 작품을 많이 만날 수 있는데 철저하게 계산된 벽면 및 바닥 인테리어와 작품이 마치 함께 제작된 것처럼 잘 어울린다. 건축을 공부한 빅은 비례미를 철저하게 고려한 선과 면의 배치 속에 등고선을 이루며 쌓아올린 사각형·반원·부채꼴 등을 통해 미세한 공간감을 만들어낸다.
36층의 한식당에는 사진작가 이정진의 흑백사진들이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도시경관 속에 녹아들어 있다. 재료 본연의 맛을 가장 중시하는 한식의 특징과 자연 그 자체의 멋을 보여주고자 하는 작품이 슴슴한 매력을 내뿜는다.
식당은 24층에도 자리 잡고 있다. 여기서는 한국의 젊은 작가 정해나의 민화풍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서울에서 가장 비싼 뷔페 식당으로 알려져 있는 콘스탄스 쪽 벽에는 정해나의 하얀 바탕의 현대적 책가도 2점이, 건너편 1914라운지앤바 쪽에는 이형록(이택균)의 작품을 방(모사)한 어두운 바탕의 책가도 2점이 걸려 대칭을 이룬다. 호텔 곳곳이 ‘오래된 새것’으로 넘실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