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오 드라기(사진) 이탈리아 총리가 연립정부의 ‘내홍’ 끝에 14일(현지 시간) 결국 사의를 표명했다. 세르조 마타렐라 이탈리아 대통령이 사표를 즉각 반려하면서 ‘총리 공백’ 사태는 일단 피했지만 유럽연합(EU)은 독일과 프랑스에 이어 유럽 내 경제 규모 3위인 이탈리아의 정국 혼란을 불안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 비율이 150%를 넘을 정도로 재정위기가 심각한 이탈리아의 정정 불안은 곧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의 혼란과 투자자 불안으로 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14일(현지 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드라기 총리는 이날 열린 내각회의에서 총리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연정 파트너인 오성운동(M5S) 소속 의원들이 이날 상원에서 표결이 진행된 260억 유로(약 34조 5000억 원) 규모의 생계비 지원 법안에 반대하는 의미로 전원 불참하자 “연립내각이 수명을 다했다”며 사의를 표명한 것이다. 드라기 총리는 대통령 집무실인 퀴리날레궁을 찾아 마타렐라 대통령에게 사임서를 전달했으나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의회와 논의해 해법을 찾아달라’며 사임을 만류했다. 드라기 총리는 20일 상하원에 모두 출석해 현 정국과 자신의 거취에 대한 입장을 내놓을 예정이다.
이번 사태는 사실상 붕괴 위기로까지 치달은 이탈리아 연정의 심각한 내홍에서 비롯됐다. 지난해 2월 드라기 총리 탄생을 도왔던 연정 파트너이자 상하원 의석 30%가량을 확보한 최대 정당인 오성운동은 내각 출범 이후 드라기 총리와 점점 대립각을 세웠다. 특히 최근 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 지원을 두고 갈등이 폭발했다. 미국·EU와 보조를 맞추려는 드라기 총리에게 직전 총리인 주세페 콘테 오성운동 대표가 강한 거부감을 표출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드라기 총리가 오성운동 내 유력 정치인에게 콘테 대표의 축출을 요청했다는 설까지 퍼지며 양측의 불화는 더욱 깊어졌다. 17개월 전 6개 주요 정당을 모두 아우른 거국 내각으로 화려하게 막을 올린 드라기 총리 시대가 최대 위기를 맞은 것이다.
역내 경제 3위국인 이탈리아가 정치적 혼란에 빠지자 EU는 좌불안석이 됐다.
가뜩이나 만성적인 저성장과 부채 문제로 유로존의 ‘약한 고리’가 될 소지가 있는 이탈리아의 정치 불안이 시장에 악영향을 미치며 유로존 전반에 대한 투자자의 불안을 초래하고 이는 유럽중앙은행(ECB)의 정책 운영에도 부담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 비율은 지난해 150.8%를 기록해 남유럽 재정위기 당시인 2011년의 119.7%보다 오히려 높아진 상태다. 로이터통신은 “과거에는 재정 남용이 원인이었다면 최근에는 만성적인 저성장으로 이탈리아 부채 비율이 치솟았다”고 분석했다. 시장에서는 ECB 총재로 재임할 당시 남유럽 재정위기 문제에 대처해 ‘소방수’라는 별명이 붙은 드라기 총리가 퇴진할 경우 이탈리아 부채 문제가 더욱 악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홍콩 출신 경제 칼럼니스트 리사 주카는 “경제 사정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경험이 풍부한 경제학자의 퇴장은 시장에 부정적 신호를 주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로 드라기 총리의 사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날 이탈리아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은 한때 3.5%까지 치솟아 독일 국채와의 금리 차(스프레드)가 연초보다 2배 이상 벌어졌다. 이탈리아발 불안으로 달러·유로 환율은 장중 0.9984달러까지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21일 2011년 이후 처음으로 금리 인상을 앞둔 ECB의 계산도 복잡해지고 있다. ECB는 사상 최고로 급등한 물가를 잡기 위해 ‘빅스텝(0.5%포인트 금리 인상)’을 고려하고 있는데 금리를 크게 올릴 경우 이탈리아 같은 고부채 국가의 차입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다시 역내의 재정위기 불안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블룸버그통신은 “금리 인상을 앞둔 ECB의 눈이 온통 이탈리아로 향하고 있다”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