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5일(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와 처음으로 만났다. 바이든 대통령은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의 배후로 빈 살만 왕세자를 지목하며 그를 국제사회의 왕따로 만들겠다는 언급을 했지만, 이날 회담에서 빈 살만 왕세자는 자신이 암살과 관련이 없다고 부인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틀간의 이스라엘 방문을 마친 15일(현지시간) 사우디의 알 살람 왕궁이 위치한 해변 도시 제다에 도착했다. 이번 사우디 방문은 미 정보 당국이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 배후로 빈 살만 왕세자를 지목하면서 바이든 대통령이 사우디를 왕따로 만들겠다고 공언하는 등 냉랭한 관계를 이어가던 가운데 이뤄진 것이어서 국제사회에서 주목을 받았다.
공항에서 왕궁으로 향한 바이든 대통령은 전용 차량에서 내린 직후 마중 나온 빈 살만 왕세자와 악수하는 대신, 서로의 주먹을 가볍게 부딪히는 방식으로 인사했다. 중동으로 순방을 떠나기 전, 미국 백악관은 최근의 코로나19 확산세를 이유로 바이든 대통령이 악수를 자제하는 등 신체 접촉을 최소화할 것이라고 알렸다.
바이든 대통령과 빈 살만 왕세자와의 주먹 인사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뤄진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직후에 만난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국왕과는 손을 잡았다. 앞서 이스라엘에서도 고위 당국자들과 악수하고,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찾아 피해 생존자들과 포옹도 했다.
이에 대해 정치전문매체 더힐은 “신체 접촉 최소화 방침은 바이든 대통령이 빈 살만 왕세자와 악수를 피하려는 핑계로 삼을 것이란 추측을 낳았다”며 “바이든 대통령은 이스라엘에 머무는 동안 여러 차례 악수함으로써 그런 계획을 곤란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사우디를 왕따시키겠다고 공언한 터라 이번 주먹 인사는 양국 관계 재설정에 본질적인 의미를 규정하는 장면이라고 로이터통신은 분석했다. 블룸버그통신도 주먹 인사가 ‘사우디 왕따 시대’를 끝냈다고 전했다.
바이든 대통령과 빈 살만 왕세자가 확대 실무회담 초반에 회의장에 들어갔던 미국 공동취재단은 바이든 대통령에겐 ‘사우디가 여전히 왕따인지’, 빈 살만 왕세자에게는 ‘카슈끄지 가족에게 사과할 것인지’ 큰 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두 지도자는 답하지 않았고, 빈 살만 왕세자는 미소 짓는 모습을 보였다고 공동취재단은 전했다.
앞서 바이든 대통령이 제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칼리드 알파이살 메카주 주지사와 주미 사우디 대사 등 격이 떨어지는 극소수 인사들만 영접한 것도 눈에 띄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스라엘 공항에서 정성스럽고 떠들썩했던 환영식과 달리 바이든 대통령은 1분간만 머문 뒤 전용 차량을 타고 떠났다”고 보도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이번 사우디 방문은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 경제에 부담을 주고 있는 유가 급등을 해결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물가 상승의 원인으로 지목된 유가 급등이 자신의 지지율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다가오는 11월 중간선거에도 악재가 될 것이란 위기감에 날을 세우고 있던 사우디아라비아에 직접 찾아갔다는 것이 외교가의 분석이다. 이번 사우디 방문의 또 다른 목적은 중동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러시아와 중국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바이든 대통령은 전날 이스라엘 임시총리와 공동회견에서 “사우디 방문은 미국의 국익을 증진한다는 더 큰 이유가 있다”며 “우린 중동 지역을 이끌면서 러시아나 중국이 치고 들어올 수 있는 공백을 만들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회담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무함마드 왕세자에게 카슈끄지 암살에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고 전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나는 미국 대통령이 인권 문제에 침묵하는 것은 우리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인지에 모순된다는 것을 매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며 “나는 항상 우리의 가치를 옹호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무함마드 왕세자는 자신이 암살 사건에 개인적인 책임이 없다면서 책임이 있는 이들에 대해 조치를 이미 취했다고 답했다고 바이든 대통령은 전했다. 미 유력지 워싱턴포스트(WP) 칼럼니스트이자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인 카슈끄지는 2018년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총영사관에서 사우디 요원들에 의해 살해됐다. 미 정보 당국은 암살 배후로 무함마드 왕세자를 지목했고, 이에 바이든 대통령은 사우디를 국제적인 ‘왕따’로 만들겠다고 공언하면서 양국관계가 냉랭해졌다.
아울러 바이든 대통령은 회견에서 사우디 방문 성과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그는 사우디와 이스라엘 관계가 정상화로 나아가는 데 진전이 있었다고 했고, 미국과 사우디는 광범위한 녹색 에너지 이니셔티브에 협력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특히 바이든 대통령은 글로벌 석유 공급을 늘리기 위해 사우디가 몇 주 내에 조처를 할 것이라는 낙관론도 피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