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프라운호퍼연구소처럼 국가 연구소에 연구개발(R&D) 투자의 자율성을 줘야 예산 낭비를 막을 수 있습니다. R&D 투자는 많이 하는데 효율성은 떨어지는 ‘코리아 R&D 패러독스’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18일 대전 대덕연구단지 한국화학연구원에서 열린 ‘제1회 국가연구소 기업가정신 토크콘서트’ 화학연편에서 과학기술 전문가들은 정부가 연구소에 R&D 투자와 인력 채용·운영에서 재량권을 주면 성과를 올릴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이는 정부가 올해 대학, 공공 연구소, 기업에 30조 원의 R&D 예산을 지원하며 R&D 투자 비중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세계 1위권이지만 대형 성과로 꼽을 만한 게 많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석열 정부에서 R&D 시스템을 재설계할 때 정부출연연구기관 등 공공 연구소에 자율적인 연구비 집행과 인력 채용·보상에 대한 재량권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경제성장률과 잠재성장률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추세에서 반전의 계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윤석열 정부가 내년 R&D 예산 증가율을 1.7%(과학기술혁신본부의 기획재정부 제출안)밖에 검토하고 있지 않아 R&D 예산의 효율적인 지출이 화두로 떠올랐다. 앞서 문재인 정부에서는 R&D 예산 증가율이 2019년 4.4%, 2020년 18%, 지난해 13.1%, 올해 8.8%로 높았다.
이날 이미혜 화학연 원장은 “인력 채용이나 운영에서도 재량권이 없는 게 애로 사항”이라며 “연구 책임자들이 인건비·직접비 등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임팩트(영향력) 있는 연구 성과를 창출할 수 있다”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프라운호퍼연구소의 경우 예산의 60%가량을 인건비로 지출하며 좋은 연구자를 많이 채용함으로써 성과를 내고 있다고 전했다. 프라운호퍼연구소는 독일 전역에 76개의 연구소와 3만여 명의 직원을 둔 유럽 최대 응용과학 연구소이다. 독일은 앞서 연구 현장의 자율성 확대를 위해 2012년 ‘The freedom of science(과학의 자유법)’을 통과시켰다. 이에 비해 화학연의 경우 연구자가 300여 명에 불과해 소재·바이오 등 핵심 기술 연구를 담당하기에 부족한 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평가 방식도 90%가량에 B등급(연봉이 깎이지 않는 수준) 이상을 줘 연구 의욕 고취에도 턱없이 미흡하다는 게 중론이다.
이 원장은 “화학연은 정부 출연금이 65%, PBS(연구원들이 과제를 수주해 인건비로 충당하는 시스템)가 35%”라며 “정부에서 연구비를 주면 알아서 할 수 있게 해주는 게 오히려 예산 낭비를 막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연구원들이 연평균 네다섯 개 과제를 진행하는데 대부분 기관 과제보다는 개인 과제에 중심을 둔다”며 “외부에서 수주하는 과제는 인건비의 100%(지금의 3분의 2 수준)까지로 제한했으면 한다”고 희망했다. 국가 임무형, 사회문제 해결형 연구보다 개인이 수주한 과제에 더 집중하는 폐단을 막자는 것이다.
실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25개 출연연 원장을 비롯한 공공 연구소 소장들은 자율성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박현민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원장은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 국가 연구소에 대한 촘촘한 관리 체계를 풀어줘야 한다”며 “이렇게 하면 연구 자율성이 50~70%는 높아져 임팩트 있는 연구를 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의지를 보였다. 기획재정부가 출연연 등을 공공기관으로 분류해 규제와 간섭을 많이 하는 것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 원장은 “산학연에서 R&D를 할 때 중요한 게 수월성을 내고 개방·협력하는 것”이라며 “기술 패권 시대에 출연연이 국가전략기술 육성과 사회문제 해결형 연구에 박차를 가할 수 있도록 자율성을 높여야 한다”고 건의했다.
김복철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이사장은 “그동안 정부에서도 이런 문제점을 잘 알고 있으나 실행하지 못했다”며 “출연연에서 PBS 문제 등 복잡하게 얽혀 있고 기재부의 규제 문제도 있어 국가 R&D 혁신이 생각만큼 진도가 나가지 않고 있다”고 고민을 털어놨다.
국양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총장은 “연구 현장에서 말도 안 되는 규제가 많다. 나열하면 한이 없다”며 “새 정부에서는 아예 안 되는 것만 규정하는 네거티브 시스템으로 패러다임 대전환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그는 “연구 현장에서 스스로 규제라고 묶어놓는 경우도 있다. 연구자들도 딱 정해놓고 그다음은 연구를 안 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광복 한국연구재단 이사장은 “연구 현장에서 자율과 책임이 중요해 균형을 잡는 것이 필요하다”며 “출연연에서 성과가 별로 안 나온다는 얘기가 있는데 기관별로 역할과 책임(R&R)을 확실히 하고 기업과 소통을 강화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그는 연간 8조 4000억 원의 R&D 예산을 기획·집행하는 연구 재단 수장으로서 임팩트 있는 연구 성과를 위해 정성 평가를 강조하더라도 현장에서는 여전히 논문, 특허 숫자 등 정량 평가 위주로 진행되는 것에 대한 고민도 토로했다. 이 이사장은 “질적 성장 시대에 맞춰 연구 재단도 변화를 위해 많이 노력하고 있다”며 “다만 연구 제안서나 보고서에 정성 평가에 집중하라고 해도 실제는 정량 평가를 하는 관행이 이어지고 있다”고 질타했다.
채영복 전 과학기술부 장관은 “그동안 출연연이 정부가 꼬리표 붙여서 내린 연구를 그대로 수행하는 데 급급해 수요처인 기업과의 미스매치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며 “출연연의 리더와 연구원들이 기업의 니즈를 잘 파악하고 본인들의 연구가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 생각하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채 전 장관은 이어 “현장에 연구비를 내려보내고 연구소가 알아서 책임지고 계획하고 연구하도록 해야 한다”며 “특히 기관장들을 3년마다 교체하지 말고 충분히 리더십을 발휘할 기회를 줘야 한다”고 건의했다. 최근 정부가 한국전자통신연구원과 한국원자력연구원의 장을 연임시키지 않기로 한 사례도 있는데 기관장에게 특별한 하자가 없으면 ‘3+3년’은 보장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 밖에 공공 연구소에도 주 52시간 상한제가 적용돼 과거처럼 ‘불 꺼지지 않는 연구소’라는 말이 사라졌다는 지적도 나왔다. 김 이사장은 “연구자들이 주 40시간만 채우면 된다는 의식이 있는데 그 자체가 잘못됐다”며 “그 시간만이라도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도록 유연근로제 등의 시행을 출연연에 주문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 원장은 “연구자의 80%를 대상으로 재량근로제를 6개월간 시범 운영한 결과 실제 일은 40시간을 넘겨 하는 경향이 있는데도 만족도가 높았다”고 소개했다. 김 이사장은 “출연연 등이 공공기관에 속해 애로가 많은데 연구자들이 자존감과 사명감을 갖고 성장할 수 있게 연구 환경을 조성하고 평가 문제도 개편하는 방안을 고민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