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3년 7월 13일 프랑스 혁명 시기 가장 선동적인 정치가로 알려진 장 폴 마라가 자신의 저택에서 암살당했다. 현장에서 체포된 범인은 24세의 젊은 여성인 샤를로트 코르데였다. 몰락한 귀족 집안 출신인 그녀는 정치적인 동기로 마라를 암살했다고 진술했다. 지지 계층으로부터 열렬한 찬양을 받았으나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세력들에게는 혐오의 대상이었던 언론인 출신 정치인 마라. 혁명 시기 그의 글은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자신이 창간한 신문 ‘인민의 벗’을 통해 루이 16세의 처형과 혁명 세력 내 온건파의 숙청을 주도하는 여론을 형성하며 마라는 급진 자코뱅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수행했다.
마라의 암살은 자코뱅 당원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혁명정부는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에게 마라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례식과 추모화 제작을 의뢰했다. 장례식장에서 마라의 시신은 칼에 찔린 상처가 드러나도록 상반신 누드로 공개됐고 그 옆에는 욕조와 나무 상자, 그리고 잉크병이 배치됐다. 마라의 암살 현장을 재현해 놓은 이 연출 방식은 그해 가을에 완성된 다비드의 작품 ‘마라의 죽음’에서 다시 한 번 등장한다. 피부병으로 유발된 가려움증을 해소하기 위해 유황을 푼 욕조에 몸을 담근 채 집필 작업을 수행하던 중 암살당한 마라의 손에는 반혁명 세력의 명단을 건네주겠다는 코르데의 거짓 편지가 들려 있다. 다비드는 이 작품에서 살인과 관련된 어떠한 행위도 묘사하지 않았다. 잠을 자듯 고요한 모습으로 숨을 거둔 마라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떠올렸다. 이 그림 속에서 마라는 폭력의 희생자이자 혁명의 순교자였다. 혁명의 피에타라 평가받을 만큼 통렬한 비극적 사실주의를 구현한 이 작품은 마라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가 행한 모든 정치적 폭력도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게 하는 힘을 발휘했다. 이렇듯 이미지의 힘은 때로는 역사적 기억보다 강력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