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환경(Environmental),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 등 지속 가능한 경영에 필요한 가치들을 중요하게 대우하는 ESG 경영이 주목받고 있다. 세계연합(UN)이 지난 2015년 지속가능발전 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를 정비한 이래 미국은 2055년까지 탄소 중립을 선언하면서 기후변화에 대응하겠다고 발표했고, 중국 또한 2060년까지 이에 참여하겠다고 공언했다.
이익을 우선시하던 시장 분위기도 몇 년이 지나는 동안 확연히 달라졌다. ESG 기준에 부합하는 기업에만 투자를 집행하는 이른바 ‘ESG 투자’가 요즘의 대세다. 2018년 기준 약 3경3600조원 정도였던 글로벌 ESG 투자 규모는 2021년에는 약 4경 4400조원으로 31% 이상 성장했다.
재미있는 점은 이런 변화가 크립토 업계의 최신 흐름과 궁합이 잘 맞는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블록체인 특유의 투명성을 이용한 일차원적인 활용이 다수였지만 요즘에는 여러가지 복합적인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다. 전통 기업과 크립토 기업의 경계가 더욱 희미해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스타벅스는 글로벌 프랜차이즈 커피 업계에서 ESG 경영을 가장 앞장서서 선도하는 기업 중 하나다. 플라스틱 빨대 대신 종이 빨대를 사용하거나, 재생지를 사용해 일회용 컵을 제조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보급하는 등 과감한 시도들을 해 왔다. 지난 2018년부터는 블록체인을 활용해 원두 생산지부터 소비자에게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빈 투 컵(Bean to cup)’ 프로그램을 시행 중이다.
소비자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이 먹는 원두가 어디의 누구에게 오는지, 스타벅스의 지불 과정이 공정했는지 등을 파악할 수 있다. 물류 플랫폼에 블록체인을 적용한다고 해서 효율이 비약적으로 개선되진 않지만 신뢰라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고, 그것이 지속가능한 경영의 동력원으로 작용하는 셈이다.
블록체인 오라클 프로젝트인 체인링크(Chainlink)는 기후 변화 방지에 도움을 주는 행동을 하면 보상을 지급하는 인센티브 시스템인 AIRS(Automated Incentives for Regenerative Stewardship)를 제작하고 있다. 녹지를 늘리고 토양을 개선하는 행위를 위성 이미지를 통해서 확인하고, 체인링크 오라클을 통해 자동으로 보상을 지급하는 방식의 스마트컨트랙트(Smart Contract)를 만드는 게 목표다.
이 시스템이 완성되면 범 지구적인 규모의 탄소 저감 협력이 가능해진다. 태양에너지 활용성은 뛰어나지만 상대적으로 탄소 저감에 관심이 없는 중,저위도 지역에 사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녹지를 늘리고 확충하도록 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토큰 보상을 통해 독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체인링크는 지난해 5월 이 같은 계획을 밝히고 코넬 대학(Cornell University) 연구팀과 함께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은행 등 중간 중개자 없이도 안정적으로 금융망을 작동시킬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막대한 전력 소모 문제로 지탄 받던 퍼블릭 블록체인들의 운용 비용도 점점 낮아지는 추세다. 가상자산 운용사인 갤럭시디지털(Galaxy Digital)이 2021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비트코인 네트워크는 전통은행 시스템이 사용하는 전기의 절반 수준을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트코인 채굴 자체도 전체의 58.5%가 재생 가능 에너지를 통해 이뤄진다.
비트코인 다음으로 시가총액이 높은 이더리움의 경우, 아예 블록체인 합의 구조를 전력을 많이 소모할 수밖에 없는 작업증명(PoW) 방식에서 지분증명(PoS) 방식으로 바꾸고 있다. 올해 9월 예정된 병합(Merge) 작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 이더리움 전체 네트워크가 사용하는 전력량은 기존 사용량의 1% 수준으로 감소한다.
토큰 보유자들이 자유로운 제안과 투표를 통해 사업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탈중앙화자율조직(DAO)은 불투명한 전통 기업의 거버넌스 구조를 보완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 모델로 꼽힌다. 유명 탈중앙화금융(DeFi, 디파이) 프로젝트인 신세틱스(Synthetix)와 메이커다오(MakerDAO)는 이미 지난 2020년과 2021년에 DAO로 운영체계를 전환했다. 지난 12월 암호화폐 전문 투자사 a16z는 NFT 기반 아티스트 협의체인 FWB(Friends With Benefit) 다오에 직접 130억 원 상당의 투자를 집행했다.
ESG 경영의 핵심은 소비자 세상에서 통하는 새로운 가치들을 포착하고, 그것을 기업에 내재화시키는 방법으로 기업가치를 상승시키는데 있다. 기업이 세상을 기민하게 읽지 않으면 투자 단계서부터 외면당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얘기다. 거꾸로, 세상을 잘 읽는 기업들은 더욱 쉽게 성공하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기도 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ESG 바람을 타고 블록체인 기술을 가져다 쓰는 전통 기업들이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토큰과 NFT, DAO 구조를 차용하는 기업들도 늘어날 것이다. 경쟁없는 시장에서 정해진 성공 공식에 따라 자기 복제를 즐기던 크립토 기업들은 어쩌면 이제부터는 긴장해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