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가 본업인 사모펀드(PEF) 운영사들이 자금을 대거 확보하면서 올 들어 국내 기업 인수합병(M&A) 시장에서 PEF에 의한 기업 인수가 5조 원을 훌쩍 넘은 것으로 나타났다. 시중금리 상승과 경기 침체 우려로 대기업 등이 새로 기업을 인수하는 데 신중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는 분석이다. 1조 원 이상의 빅딜도 PEF가 적극 나서고 있어 경제계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은 갈수록 커지는 양상이다.
22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올 들어 7월 현재 체결 혹은 발표된 PEF의 주요 기업 인수 거래액이 5조 원을 넘어선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이들 거래의 매도 측도 PEF가 상당수를 차지했다.
글로벌 운용사인 베어링PEA는 지난달 초 세계 1위의 폴리이미드(PI) 필름 제조사로 코스피에 상장된 PI 첨단 소재를 1조 2750억 원에 인수하기로 했다. 매각 측은 글랜우드PE로 지분 54%를 보유했다. 비슷한 시기 국내 PEF인 한앤컴퍼니는 SKC(011790)의 필름 사업을 1조 6000억 원에 인수하기로 하고 연말까지 거래를 완료한다는 방침을 공개했다. SK(034730)C의 필름 사업은 올 초부터 투자 유치를 추진했다 성사되자 못하자 아예 매각으로 돌려 PEF를 새 주인으로 맞았다.
IMM인베스트먼트가 보유 중인 대형 폐기물 처리 업체 EMK는 싱가포르계 운용사인 케펠이 13일 인수 우선협상자로 선정돼 약 8000억 원에 사들이기로 했다. 태영그룹이 대주주인 폐기물 처리 업체 에코비트가 EMK의 유력한 인수 후보였지만 케펠이 자금력에서 한발 앞섰다. 이에 앞서 E&F PE는 6월 중순 KG ETS(151860)의 환경사업부 인수를 4958억 원에 완료해 KG그룹이 6월 말 쌍용차를 품는 데 돈줄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 스톤브릿지캐피탈과 한앤브라더스가 연합해 안마 의자 전문인 바디프랜드를 VIG파트너스에서 4200억 원에 인수하는 작업을 조만간 완료할 계획이며 창호 업체 윈체는 VIG파트너스가 최근 윈체의 창업주 일가와 손잡은 어센트PE에 2000억 원을 받고 되팔았다. 4월 글로벌 PEF인 베인캐피탈도 국내 미용·의료기기 업체인 클래시스 지분 60.84%를 6699억 원에 사들였다. 매각이 진행 중인 ‘스마트폰용 연성동박적층필름(FCCL)’ 제조사인 넥스플렉스를 두고도 사모펀드 JCGI와 글로벌 펀드인 TPG가 6000억 원대 인수가를 놓고 막판 경쟁을 벌이고 있다.
기업들이 M&A 전쟁에 나서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모펀드의 ‘투자 본능’을 따라가지 못하는 형국인 셈이다. 올 들어 SK에코플랜트가 싱가포르 전자 폐기물 처리 업체 테스를 1조 2000억 원에 인수하고 4월 두산이 반도체 검수 기업 테스나를 4600억 원에, 현대백화점이 5월 매트리스 업체 지누스를 8790억 원에 각각 사들였지만 PEF의 실적에는 미치지 못했다. IB 업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글로벌 긴축과 경기 침체 우려에 삼성전자(005930)와 LG전자 등 대기업조차 쉽사리 빅딜에 나서지 못했다”며 “사모펀드는 최근 2~3년간 조성한 막대한 자본을 앞세워 알짜 자산을 확보하는 기회로 삼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지난해 말까지 국내에 등록된 기관 전용 사모펀드 수가 1060개에 달해 2020~2021년에 이들이 확보한 자금만 212조 80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올해 최대 M&A가 될 가능성이 높은 카카오(035720)모빌리티 매각도 국내 최대 사모펀드인 MBK파트너스가 독점적 지위를 갖고 협상을 진행 중이며 일진머티리얼즈 인수를 놓고는 롯데케미칼과 베인캐피탈, 브룩필드자산운용이 3파전을 벌이는 모습이어서 재계에서 PEF의 위상은 더욱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