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말 8초.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여름 휴가로 계획하는 기간입니다. 그런데 휴가를 언제 갈지도 정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곳이 있습니다. 바로 대통령실입니다. 직장 상사인 대통령이 휴가를 떠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21일 용산 대통령실 출근길에 기자들과 만나 여름 휴가 계획을 묻는 질문에 “아직 세우지 않았다”며 “여러 어려운 상황들이 해소되면”이라고 답했습니다. 윤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고물가, 고유가, 고환율 이른바 ‘3고’ 위기를 맞았습니다. 코로나19 재유행도 본격화하며 방역당국도 비상입니다. 대우조선해양 파업 사태가 극적인 노사 협상 타결로 해소됐다지만 대내외적 ‘어려운 상황들’은 여전합니다. 윤 대통령의 휴가 고민이 길어지는 이유입니다.
역대 대통령들은 통상적으로 7월말, 8월초에 3~5일간 여름 휴가를 갔습니다. 대통령의 휴가지는 대부분 군 부대 휴양시설입니다. 일반 국민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으면서도 보안적으로도 양호하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전 군 휴양소, 이명박·문재인 대통령은 진해 군 휴양소에서 여름 휴가를 보낸 적 있습니다. 과거 전두환 대통령이 재임 시절 충북 청주에 대통령 전용 별장인 ‘청남대’를 짓기도 했지만 노무현 대통령 때 민간에 반환됐습니다.
대통령들은 취임 첫 해의 여름 휴가는 무난하게 보냈지만 그 이후에는 천재지변, 감염병, 경제 위기, 외교 이슈 등으로 휴가를 취소하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혹은 휴가를 미루거나 휴가 일정을 잡더라도 관저에서 조용히 쉬었습니다. 오죽하면 대통령의 ‘휴가 징크스’라는 말까지 생길 정도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외환위기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휴가를 갈 수 없다며 1998년 임기 첫 번째 여름 휴가를 취소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6년 여름 청남대로 휴가를 갔지만 집중 호우 피해가 심각해 하루 만에 복귀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2007년 아프카니스탄 피랍 사태로 휴가를 취소했습니다. 2004년에는 탄핵, 2006년에는 태풍 피해 때문에 교외로 떠나지 못하고 관저에서 휴가를 보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11년 7월 말에 휴가를 갈 계획이었지만 당시 중부 지방 폭우로 우면산 산사태가 발생하자 휴가를 나흘 늦췄습니다. 박근혜 대통령도 2014년에는 세월호 사건, 2015년에는 메르스 여파로 관저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유독 ‘휴가 복’이 없는 대통령이었습니다. 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휴가가 있는 삶’을 공약으로 내는 등 대통령부터 휴가를 적극적으로 쓰겠다는 의지가 강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문 대통령도 2019년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 2020년 집중 호우, 2021년 코로나19로 휴가를 취소하며 3년 연속 휴가를 가지 못했습니다.
대통령에게 휴가는 중요합니다. 단순히 “대통령도 사람이니 쉬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역대 대통령들은 고비 마다 휴가 기간을 국정 운영의 변화를 준비하는 고독한 시간으로 사용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8월 첫 여름 휴가를 청남대에서 보낸 후 특별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 보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재정경제명령’, 즉 금융실명제입니다. 또 1995년 11월 청남대에 나흘간 머문 뒤에는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을 구속시킨 ‘역사바로세우기’ 구상이 발표됐습니다. 이 때문에 ‘청남대 구상’이라는 용어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휴가는 개각을 고민하는 시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여름 휴가만 다녀오면 크고 작은 인사 교체가 이어져 ‘휴가 복귀 후 인사 법칙’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5년 여름 휴가를 마치곤 메르스 사태 초기 대응 실패의 책임을 물어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과 최원영 고용복지수석을 동시에 교체했습니다.
이런 역사 때문에 일부 대통령실 출입기자들 사이에선 윤석열 대통령이 지지율을 반등시킬 ‘인적 쇄신’ 등 카드를 휴가 복귀와 함께 들고 올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옵니다.
대통령실 참모진들은 윤석열 대통령이 여름 휴가를 반드시 가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정부 출범 이후 외교 일정만 하더라도 한미 정상회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 회의 등 쉼 없이 달려온 대통령이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입니다. 실제로 대통령실 관계자들은 참모들이 윤 대통령에게 휴식을 강력하게 권유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강인선 대통령실 대변인도 “대통령은 일할 때 열심히 하고, 휴가 땐 푹 쉬자는 생각을 하는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윤 대통령이 해마다 쓸 수 있는 연차는 총 21일입니다. 국가공무원 복무규정 제 15조에 따르면 공무원으로 재직한 기간 △3~6개월 미만은 3일 △6개월~1년 미만은 6일 △1~2년 미만은 9일 △2~3년 미만은 12일 △3~4년 미만은 14일 △4~5년 미만은 17일 △5~6년 미만은 20일 △6년 이상은 21일까지 연차를 쓸 수 있습니다.
이때 재직 기간은 ‘공무원’으로서 일했다면 그 직업과 상관 없이 모두 경력으로 인정해 산정합니다. 윤 대통령은 검사 생활을 26년 했으니 ‘6년 이상’ 기준을 충족합니다.
물론 1년에 21일을 다 쓰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입니다. 앞서 “휴식이 곧 국가경쟁력”이라며 “연차휴가를 다 사용할 계획”이라던 문재인 전 대통령도 재임 5년 동안 연평균 5.4일만 연차를 사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 대통령이 앞으로 과감히 휴가를 떠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에 넓게 퍼진 ‘휴가 눈치보기’ 악습을 깨는 계기가 되길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