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곡물 수출을 위한 우크라이나, 러시아, 튀르키예(터키), 유엔의 4자 합의가 이뤄진 바로 다음 날, 러시아군이 쏜 미사일이 우크라이나 남부 수출항을 직격했다. 우크라이나는 합의의 중대성을 감안해 수출 재개 준비를 이어가겠다는 입장이지만 ‘세계 식량난 해소를 위해 안전한 곡물 수출을 보장하자’는 합의문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러시아 측이 공격을 감행하면서 합의 이행 가능성은 점차 낮아지는 모양새다. 국제사회는 즉각 강한 어조로 러시아를 비판하고 나섰다.
23일(이하 현지 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남부 작전사령부는 이날 러시아군의 칼리브르 순항미사일 2발이 우크라이나 오데사 항구의 기반 시설을 타격했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군이 나머지 2발의 미사일을 격추하며 추가 피해를 막았지만 이날 공격으로 항구의 양수장이 파괴되고 부상자가 발생했다. 유리 이그나트 우크라이나 공군 대변인은 해당 미사일들이 크름반도 인근 흑해 군함에서 발사됐다고 말했다. 크름반도는 러시아군과 친러시아 반군이 주둔하고 있는 지역이다. 러시아는 이번 공격이 자국과 무관하다고 주장했다가 24일에서야 “오데사에 있는 군사시설을 공격했다”며 말을 바꿨다.
국제사회는 일제히 규탄의 목소리를 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대변인을 통해 “(이번 공습을) 분명히 규탄한다”면서 “22일 모든 당사자들(우크라이나·러시아·튀르키예·유엔)이 맺은 합의는 전 세계 식량위기를 해소하는 데 극도로 중요하다”며 러시아에 합의 이행을 촉구했다. 합의에는 우크라이나 오데사에서 출항한 곡물 선박이 흑해 국제 해역에 도착할 때까지 러시아는 공격을 하지 않고 튀르키예 이스탄불에 안전보장조정센터를 설립해 4자가 공동으로 화물선 출입을 감시한다는 내용 등이 담겼다. 미국, 유럽연합(EU)도 비판에 가세했다.
우크라이나는 일단 합의의 중요성을 감안해 수출 재개를 준비하겠다는 입장이다. 미콜라 솔스키 우크라이나 농업장관은 월스트리트저널(WSJ)에 “항구 공격은 결국 모든 수출 과정에 차질을 야기하겠다는 것”이라고 우려하면서도 “러시아뿐 아니라 유엔·튀르키예와도 체결한 합의인 만큼 수출 준비를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합의는 전쟁 이후 고조된 글로벌 식량난을 진정시킬 돌파구로 평가돼 왔다. 곡물 수출 대국인 우크라이나의 흑해 수출이 러시아 공격으로 막혀 오데사 항구에만 약 2000만톤의 곡물이 묶여 있는데 앞으로 매달 500톤의 곡물이 수출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러시아의 공격으로 합의 이행에 대한 의구심은 말할 수 없이 커졌다. 곡물을 실은 선박이 지나는 흑해 항로가 여전히 전쟁 지대라는 점에서 합의 타결 이전부터 불안감이 있었는데 러시아가 자국의 개입을 부정하며 우크라이나 선박에 공격을 가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꼴이 됐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뒤늦게 군사시설을 겨냥한 공격이었다고 말을 바꾼 것에 대해서도 협정 위반 시비를 피하기 위한 술수라는 지적이 나온다. WSJ가 입수한 합의문 사본에 따르면 ‘곡물 수출에 사용되는 민간 선박과 항구 기반 시설에 대한 공격을 자제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번 공격은 러시아가 무엇을 약속하든 그것을 이행하지 않을 방법을 찾을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며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
한편 지금까지 우크라이나에 82억 달러 상당의 안보 지원을 제공한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2억 7000만 달러어치의 무기를 추가 지원하기로 했다. 이번 지원에는 4기의 고속기동포병로켓시스템(HIMARS)과 580대의 피닉스 고스트 전술 드론 등이 포함된다. 미국은 ‘공격용 무기’로 분류되는 전투기 지원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를 신뢰할 수 없는 만큼 점령지들을 되찾은 후에야 휴전에 돌입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러시아 점령지 탈환을 시도 중인 우크라이나는 23일 서방이 제공한 HIMARS를 이용해 러시아가 장악한 남부 헤르손의 교량을 파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