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도, 혈압이 높아도, 담배를 피워도 혈관이 건강한 사람들은 무엇이 다를까?
동맥경화를 유발하는 위험요소가 많은 데도 혈관이 깨끗한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특정 유전자 돌연변이를 가진 것으로 분석됐다. 명백한 동맥경화 위험요인이 있어도 정상 혈관을 유지하는 이른바 ‘슈퍼혈관’의 비밀이 마침내 풀릴 것으로 보인다.
세브란스병원은 이상학 심장내과 교수와 원홍희 성균관의대 삼성융합의과학원 교수 연구팀의 공동 연구를 통해 이 같이 나타났다고 26일 밝혔다.
연구팀은 여러 가지 혈관질환 위험요인을 가진 고위험 환자들 가운데 혈관이 깨끗한 경우가 있다는 점에 착안해 혈관보호 유전자가 있을 것으로 가정하고 이를 밝히는 조사에 나섰다. 성별·나이·혈압·콜레스테롤·당뇨병 등으로 향후 10년간 관상동맥질환 발생 위험을 계산할 수 있는 프레밍험 위험도 점수가 14점 이상인 환자 중 관상동맥조영술과 CT(컴퓨터단층촬영) 검사 등에서 정상 혈관 소견을 보이는 슈퍼혈관군 72명과 위험점수는 같지만 실제 심혈관질환을 앓는 일반군 94명을 각각 연구했다. 학계에서는 프레밍험 위험도 점수가 14점 이상이면 10년 안에 심혈관질환 발생할 확률이 16% 이상인 고위험군으로 간주하고 있다.
연구팀은 유전체 전체에서 변이를 발굴하는 전장유전체연관분석(GWAS)를 활용해 슈퍼혈관과 관련 있는 유전자 변이를 발굴했다. 또한 유전자 변이와 관련된 유전자 발현량 차이가 실제 인체 조직 변화를 발생시키는지 검증하기 위해 유전자 발현량 조절 연구(eQTL)도 병행했다.
상염색체 500만 개를 분석한 결과, 슈퍼혈관과 관련된 변이가 있는 유전자자리(locus) 10개가 발견됐다. 혈관 생성 등에 영향을 미친다고 알려진 PBX1와 인체시계에 영향을 주는 NPAS2 유전자 등이 대표적이다. 다만 변이가 있는 다른 유전자들의 인체 내 역할에 대해서는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이번 연구는 죽상동맥경화성 심혈관질환 발생 위험을 높이는 요인이 많은 데도 정상 혈관을 유지할 수 있는 유전적 배경을 처음으로 밝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죽상동맥경화성 심혈관질환은 심근경색, 협심증과 같이 동맥이 좁아지거나 막히는 질환을 총칭하는 용어다. 고령·고혈압·당뇨병·고지혈증·흡연·유전 등이 죽상동맥경화성 심혈관질환을 일으키는 대표 원인으로, 한 사람이 이러한 위험요인을 동시에 가지면 질환 발생 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고 알려졌다.
앞서 특정 유전자 변이와 심혈관질환 관련성을 유전학적으로 밝히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높은 콜레스테롤 수치 등 여러 가지 위험요인이 동반된 상황에서도 드물게 혈관이 정상인 이유를 밝힌 연구는 없었다. PCSK9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있으면 콜레스테롤이 낮게 유지되는 동시에 심혈관질환 발생이 적다고 알려졌을 뿐이다.
이상학 교수는 “혈관질환 환자를 주로 대상으로 삼은 기존 연구 관행에서 벗어나 혈관이 건강한 사람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했다”며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 등 전통적인 위험요인을 넘어 새로운 의학적 표적을 발견해 혈관질환을 예방할 수 있는 치료제 개발의 단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번 연구 결과는 일본동맥경화학회지(Journal of Atherosclerosis and Thrombosis) 최근호에 게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