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실패·욕망…몸에 새겨진 삶의 흔적

박치호 개인전 '빅맨-다시 일어서는 몸'
내달 21일까지 전남도립미술관
부유하는 삶의 시간 속에 희미해진 기억
경험과 시간이 쌓여 만든 몸의 상처·주름

박치호의 2022년작 '부유' /광양=조상인기자

성인 키보다 더 큰 화폭을 덩그러니 머리 하나가 차지했다. 눈은 뭉개지고 입은 지워졌다. 한때는 세상을 향해 부라리던 눈, 크게 외치던 입이었으려나. 눈 감고 입 닫은 얼굴은 구르며 떠돌다 닳고 닳은 바닷가 돌멩이를 닮았다. 거대한 회화 사이로 석탄 덩어리처럼 시커먼 두상 조각이 여기저기 놓였다. 이목구비를 구분할 수 없으니, 누구의 얼굴인지 특정할 수도 없다. 작가의 자화상일 수도, 타인의 초상일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얼굴일 지도 모른다.


전남도립미술관에서 한창인 박치호 개인전 ‘빅맨(Big Man)-다시 일어서는 몸’의 시작이다. 신작 20여 점을 포함해 회화·조각·드로잉 등 총 70여 점을 선보인 대규모 회고전이다.


바깥쪽 전시장이 두상들이라면, 안쪽 전시장에는 몸통이 즐비하다. 중년 남자의 벗은 몸을 초대형으로 확대해 그렸다. 처진 가슴과 불룩한 배, 주글주글한 살결은 그가 살아온 삶을 고스란히 말해준다. 몸뚱이는 표정을 바꿀 수 있는 얼굴보다도 더 정직하다.



전남도립미술관에서 8월21일까지 열리는 박치호 개인전 '빅맨-다시 일어서는 몸' 전경. /광양=조상인기자

희미한 머리, 새기는 몸

기억이 지워진 머리, 경험이 새겨진 몸통들이다. 박치호 작가가 지난 28년간 걸어온 궤적을 안다면 작품에 대한 이해가 한결 수월하다. 여수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미술대학을 졸업한 후 다시 여수로 돌아가 작업하는 그는 자신의 출발지를 잊지 않았다. 시작점은 바다였다.


“바닷가를 산책하노라면 매일같이 떠내려오는 물체들을 마주하곤 합니다. 그것들을 모아서 작업을 구상할 수 있을 정도였죠. 그렇게 떠밀려오는 사물들은 하나같이 파도에 휩쓸려 찢기고 깨져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게 세상을 떠돌다 돌아온 사물들과 같아요. 결국에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부유하는 삶이 되는 거였어요.”



박치호 '다시 일어서는 몸' 전시 전경. /광양=조상인기자

박치호 작가가 2020~2022년에 걸쳐 제작한 '부유' 연작. /사진제공=전남도립미술관

눈·코·입 희미한 두상들의 제목이기도 한 ‘부유(浮游·Floationg)’ 시리즈가 탄생했다. 나, 우리, 나아가 인류 모두가 겪고 있는 ‘부유하는 삶’을 응축했다. 소재로 택한 것은 토르소다. 원래는 완전했던 몸이었나 두 팔, 두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남은 몸뚱이 토르소. 작가는 이것을 세월과 세파에 휘말려 떠다니다 부서지고 남은 파편 덩어리로 여겼다. 파도에 밀려온 부유물과 몸뚱이의 연결고리는 시장에서 만난 할머니들이었다.


“기울어진 어깨와 등, 절뚝거리는 다리를 보면서 외형상으로는 사지가 다 붙은 온전한 몸이지만 그들이 살아낸 시간들이 이룬 내면은 정말 ‘깨진 덩어리 토르소 같은 모습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장을 다니며 할머니들을 스케치해 와서 토르소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박치호의 신작 '다시 일어서는 몸' 연작이 전남도립미술관에서 전시중이다. /광양=조상인기자

이리저리 떠다니다 도달한 ‘부유’의 몸을 포착하던 그 무렵, 작가는 머리만 따로 그린 ‘망각’ 시리즈를 병행했다. ‘부유’의 인체가 팔·다리 없는 몸뚱이라면, ‘망각’의 인물은 눈·코·입이 희미한 머리통이다.


“다쳤을 때, 처음엔 상처가 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흉터도 작아지고 희미해집니다. 망각도 마찬가지로, 굉장한 아픔과 엄청난 기쁨의 모든 기억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아물고 희미해져 작은 흔적만 남기는 것이죠. ‘망각’은 사실, 연한 실루엣만 남아 세밀한 흔적이 된 기억입니다.”


전시장 한쪽 벽에 ‘망각’ 연작 8점이 나란히 걸렸다. 눈코입이 마모되듯 희미해 얼굴도, 표정도 알 수가 없다. 막막하고 먹먹하다. 반면 몸통은 살결과 주름까지 너무나 생생하다.



전남도립미술관에서 한창인 박치호 개인전 '빅맨-다시 일어서는 몸' 전시 전경. /사진=조상인기자

박치호 '다시 일어서는 몸' /사진제공=전남도립미술관

갓 태어난 몸은 매끈하다. 상처도 주름도 없다. 살아가는 몸에는 삶의 흔적이 담긴다. 치열했던 삶, 고단했던 삶이 상처와 주름을 만든다. 몸은 그리하여 자신이 경험한 삶의 흔적을 새긴다. 반면, 머리는 생생했던 기억을 조금씩 잊어간다. 결코 잊을 수 없으리라, 잊지 않겠다 했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파도에 당당히 맞선 돌이 축적된 시간에 의해 깎이는 것처럼.


서로 다른 듯한 두 작업을 ‘시간성’이라는 공통분모가 관통한다. 몸뚱이는 지나간 시간과 그에 따른 경험을 주름·흉터·굳은살 등으로 남긴다. 시간의 흐름 속에 기억이 닳고 감정이 마모된 머리는 눈코입의 흔적만 남은 두상이 됐다. 몸은 새기고 머리는 지운다.



작가 박치호 /사진제공=전남도립미술관

“신작들은 ‘다시 일어서는 몸’이라는 주제로 상처를 견뎌낸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보려 했습니다. 몸에는 과거의 희망과 실패, 욕망 같은 것들이 흔적으로 남습니다. 흉터와 주름이 있죠. 식욕이라는 욕망에 의해 생긴, 살 터진 몸뚱이도 있습니다. 앓고 있거나 앓았던 병력까지도 보입니다.”


고단했던 삶과 시간을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고단한 방법을 자청했다. 그는 매끈한 캔버스의 ‘쉬운 길’을 거부했다. 동양화를 전공한 그는 석채로 쓰이는 돌가루를 섞어 안료를 만들었다. 커다란 캔버스에 두세 번 칠한 후 사포질 해 고운 표면으로 만든 다음 또 색을 입혔다. 이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깊이있는 색감을 내기 위해서라고 했다. 표면적 찰나가 아닌 축적된 시간을 그리기 위한 과정으로 보인다. 육안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미세한 안료들이 돌가루의 요철을 붙들고 화면에 더 견고하게 안착하게 됐다. 박 작가에게, 한 인물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그리는 일에 그 정도의 수행은 당연했다.


“매번 반복되는 사포질과 붓질 속에서 이 사람이 살아온 궤적이 좀 더 표현되기를 바라며, 그런 형식적인 절차들을 좀 거쳤던 것 같아요. 이번 신작들 중에 붉은 기운이 좀 더 감도는 것들이 있는데, 그리던 당시의 제 감정들이 반영된 것 같습니다. 삶의 힘든 여정 속에 있는 사람의 몸을 통해 관객들이 반성과 성찰, 회복과 희망을 찾기를 바랍니다. 시간 속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은 ‘존재의 성숙’이니까요.”


전시는 8월21일까지.



전남도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박치호 개인전 '빅맨-다시 일어서는 몸' 전경. /광양=조상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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