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의 실세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2018년 ‘카슈끄지 암살 사건’ 이후 처음으로 유럽 순방에 나섰다. 고유가로 몸값이 높아진 사우디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방문을 계기로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26일(현지 시간) 사우디 국영 SPA통신 등에 따르면 무함마드 왕세자는 이날 전용기로 그리스에 도착해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총리와 사우디에서 그리스를 거쳐 유럽으로 전력을 공급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또 에너지·스포츠·보건·군사·농업 등 다양한 분야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양국 간 전략파트너십협의회를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회담에서 “나는 그리스에 절대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며 “우리는 양국은 물론 지역 모두에 ‘게임체인저’가 될 만한 것들을 많이 갖고 있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사우디가 풍부한 석유 자원을 토대로 서방 국가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시사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그리스에 이어 프랑스를 방문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만날 예정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미 지난해 12월 사우디를 방문해 사우디의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사우디 요원들에게 살해된 후 서방 정상으로는 처음으로 무함마드 왕세자와 회동한 바 있다.
외신들은 무함마드 왕세자의 이번 유럽 순방이 카슈끄지 사건으로 인한 국제적 고립에서 탈피하는 상징적 움직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카슈끄지 암살의 배후로 무함마드 왕세자가 지목되면서 사우디는 서방의 강한 비난을 받았다. 특히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이후 사우디를 국제사회에서 ‘왕따’로 만들겠다고 공언하며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촉발된 에너지 위기로 국제 유가가 10년 만에 최고로 치솟자 서방에서는 석유 대국 사우디의 원유 증산이 절실해졌다. 이달 15일 바이든 대통령이 국내의 비판을 무릅쓰고 사우디를 방문하자 미국이 사실상 사우디에 면죄부를 줬다는 해석이 잇따르기도 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런 상황에서 이뤄진 무함마드 왕세자의 유럽 순방에 대해 “서방 국가들이 유가를 진정시키기 위해 사우디와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는 신호”라고 해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