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였으면 할 때가 있다. 복잡한 상황을 벗어나고 싶을 때는 특히 그렇다. 하지만 어른이라고 모든 걸 알고 현실에 맞춰 의젓하게 행동해야 하는 걸까? 또 아이라고 아무것도 모르고, 보호를 받아야만 할까? 넷플릭스 폴란드 영화 '동화 보기엔 너무 커버린'은 이 의문들에 나름의 답을 준다.
영화는 컴퓨터 게임광인 10살 발디가 혼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습을 비추며 시작된다. 물을 따라주는 것도,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도 엄마와 함께인 응석받이다. 그러다 발디의 엄마는 병으로 입원하고, 발디는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의 이모할머니와 지내게 된다. 그 후 발디의 삶은 완전히 바뀐다. 이모할머니는 혼자 해본 게 없는 발디에게 식사, 등교, 설거지 등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하게 만든다.
발디는 이모할머니에게 자신은 ‘어린아이’라 혼자 무언가를 하는 게 힘들다고 불평한다. 하지만 이모할머니는 험난한 세상을 살아내려면 뭐든 혼자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던 중 발디는 ‘어른다워야 할’ 이모할머니가 천장에 끈을 매달고 몸과 연결해 스카이다이빙 놀이를 하는 걸 보게 된다. 이에 발디는 “이모할머니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라며 한심한 듯 지나친다. 발디의 엄마는 ‘발디에게 차를 내오라’고 하는 이모할머니에게 “아이한테 무슨 이런 걸 시키냐"면서 타박한다. 이렇듯 ‘어른다움’과 ‘아이다움’은 작품 내내 등장하는 중요한 소재다.
작품 초반 발디가 주장하는 아이다움과 어른다움은 명확했다. 발디에게 '아이다움'은 보호가 필요하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야 하며,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반대로 발디에게 '어른다움'은 아이를 챙기고, 모든 걸 고려할 줄 아는 것이다. 하지만 이모할머니와 지낸 발디는 아이지만 아이답지 않은 독립적 존재가 된다. 자신에게 어른이어야 하는 이모할머니는 아이인 자신을 보호하지 않고 뭐든 혼자 하라고 시킨다. 특히 이모할머니가 집안에서 스카이다이빙을 즐기는 건 발디식 어른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발디가 생각한 아이다움과 어른다움의 경계는 점차 허물어졌다.
아이와 어른의 구분이 없어지는 현상은 현실에서도 자주 보인다. 현대 성인들이 재미, 유치함, 판타지 등의 가치를 추구하는 건 이미 하나의 대중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를 ‘키덜트(Kidult)’라 부르기도 한다. 반면 아이들은 미디어를 통해 여러 세대의 문화를 간접 경험한다. ‘애 어른’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동화 보기엔 너무 커버린’은 이러한 사회 현상을 따뜻한 가족 서사 안에 자연스레 녹였다. 그리고 관객에게 ‘진정한 어른과 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거짓말을 보는 관점이 새롭다. 영화는 거짓말의 원인에 집중했다. 거짓말이 좋고 나쁘다 판단하는 여느 영화들과 다르다. 극 중반 발디는 사랑에 대해 거짓말한 친한 친구에게 실망한다. 이에 발디 할아버지는 거짓말하는 이유에는 두려움, 어리석음, 사랑이 있다고 말한다. 특히 사랑에 의한 거짓말은 거짓말을 한 사람이 더 상처받는 거짓말이라며 친구를 용서하라 권유한다. 발디 할아버지가 알려준 거짓말의 원인은 현실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예컨대 사람들은 부모님께 혼나기 두려워 거짓말을 하기도, 친구가 걱정할까 아픈 걸 말하지 않기도 한다. 영화는 발디 할아버지의 말을 빌려 사회를 꿰뚫는 메시지를 전한다.
‘동화 보기엔 너무 커버린’은 자극적 콘텐츠 홍수 시대에 나온 몇 없는 실사 가족 영화다. 오동통한 볼을 가진 발디가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변하는 모습은 마음을 따스히 녹인다. 가족 영화답게 악역도 없어 보기에 편안하다. 폴란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해 평화로움이 화면 너머로 전해진다. 하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중간중간 묵직한 메시지들도 찾아볼 수 있다. 보기에 편안하지만 생각할 여지를 주는, 다시 볼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시식평 - 따뜻한 가족 영화 속 현실 세상 엿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