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변요한이 왜군 최고의 장수 와키자카를 연기했다니. 작품을 보지 않은 이들이라면 쉽게 연상되지 않을 것이다. 영화 ‘명량’의 배우 조진웅과 같은 역이니 더더욱 그렇다. 김한민 감독이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이하 ‘한산’) 캐스팅 제안을 했을 때 변요한 스스로의 머리에도 물음표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곧 자신도 알지 못한 묵직한 장군의 모습을 김 감독이 봐줬다는 걸 깨달았고 연기로 증명해냈다. ‘한산’을 관람한 이들이라면 알 것이다. 변요한 아닌 와키자카는 상상되지 않는다는 것을.

변요한이 명량해전보다 5년 빠른 한산도대첩(1592) 시기의 와키자카를 연기했다. 와키자카는 왜군 수군 최고사령관으로 해상과 육지 전투에 모두 능한 천재 지략가다. 전쟁에서의 승리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고, 승리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대담하고 냉철한 장수인 와키자카도 한산섬 앞바다에서 이순신 장군(박해일)이 거느린 조선 수군과 학익진 전법 앞에서 무너졌다.

변요한이 ‘한산’에 몰입하기 위해 시작한 건 와키자카가 아닌 이순신 장군이었다. ‘명량’이 개봉했을 당시 다시금 이순신 장군을 떠올리긴 했지만, 어느 순간 바쁘게 살아가며 망각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와키자카 역을 제안받으면서 ‘이순신 장군을 다시 한번 되새기자’는 마음을 먹었고, 김 감독을 통해 역사 공부를 시작했다.

“제일 중요한 건 대본을 보고 그 인물의 메시지를 가슴에 담는 거예요. 그게 안 담기면 아무것도 안 돼요. 첫 시작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자긍심, 의(義)를 따르라는 평화의 메시지였고요. 그렇지만 와키자카를 연기하려면 배제해야 했죠. 아니면 빌런으로만 보일뿐 입체적으로 빌드업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이순신 장군을 잠시 내려놓고 와키자카의 포인트를 찾으려고 했어요.”

처음 대본을 보고 분석했던 와키자카는 빌런이었다. 반면 김 감독은 와키자카를 안타고니스트라고 정의했다. 변요한은 그때부터 이순신 장군과 와키자카를 남자 대 남자, 장군 대 장군으로 두고 연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출발했더니 일본어 디자인을 다시 해야 했어요. 일본어 선생님이 엄청 고생하셨죠. 현대에 리얼리티로 쓰는 일본어가 아니라 16세기에서 사용하는 것이어야 했어요. 사극 톤에서 나오는 말들을 정말 많이 활용했죠. 일본 대하드라마를 하는 분들에게 대본을 보내서 검수를 받기도 했고요. 전 한국 사람이라 당연히 한계가 있잖아요. 목표는 우리가 기존에 들었던 톤이 아닌, 새로운 걸 디자인하는 것이었어요.”

김 감독의 전작인 ‘명량’은 역대 한국 박스오피스 1위를 고수하고 있다. 후속작의 주인공이라면 부담감이 있을 법하다. 선배 배우와 같은 역할을 연기하는 것도 그렇다. 그러나 변요한은 “대한민국 배우라면 당연히 아는 정보고, 그 외에는 안 들으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의 인터뷰도 보지 않았다”며 의연했다.

“모든 작품에 들어갈 때는 부담감과 책임감이 있어요. ‘한 번 해볼까? 해볼 수 있을까? 잘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의심이 드는데 항상 그렇게 들어가죠. ‘명량’에서 와키자카 역을 조진웅 선배님이 연기하고 현장을 경험했지만, 전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어요. 듣지 않아야 나만의 와키자카를 만들 수 있을 거 같았거든요.”

그렇게 변요한의 와키자카가 구체화됐다. 모든 시작은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나로부터. 직접 느낀 경험치,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 공부하고 투자했던 시간만큼 인물이 나온다는 생각으로 거짓말하지 않고 부지런하게 했다. 그 결과 젊은 패기의 와키자카가 탄생했다.

“내 것이 아닌데 억지로 웃기려고 한다든지 오버 액팅하고 싶지 않아요. 내가 공부한 게 가슴속에 쌓이고 몸에 배이면 현장에서 그대로 부딪치려고 하죠. 현장에서 느껴지는 공기도 있고, 상대 배우들도 많이 준비했기 때문에 그들의 말도 듣고 싶고 눈빛도 중요하거든요. 이번에도 조재윤, 이서준 등 배우들 있었기 때문에 내가 와키자카처럼 보이지 않았나 싶어요.”

외적인 요소도 크게 작용했다. 분장팀과 함께 여러 번의 테스트를 거쳐 이미지를 변신했다. 캐릭터를 빌런으로 잡고 날카롭게 보이려 다이어트를 했지만 오판이었다. 외국에서 두 달 걸려 제작한 갑옷이 너무 널널하게 남았기 때문. 스스로 장군 같지 않아 보였고 자신감도 없었다.

“무제한 증량을 하자 싶었어요. ‘몇 키로 찌자’도 아니고 작품 끝날 때까지, 증량할 수 있을 때까지 증량했죠. 마지막 촬영 때 몸무게로만 본다면 89kg였거든요. 90kg 넘어갈 때도 있고 내려갈 때도 있었고요. 갑옷이 투구까지 합하면 25kg이에요. 처음에는 엄청 무거웠는데 증량하고 보니 편하더라고요. 피로감도 있었는데 그냥 제 옷 입은 것 같았어요.”(웃음)

증량을 하다 보니 문제는 분장이었다. 체형이 변하니 쓰는 근육이 달라져 분장이 어색했다. 분장팀과 고민하다가 이미지 콘셉트를 호랑이로 잡았다.

“호랑이 사진을 두고 이것처럼 분장을 해달라고 했어요. 작은 주름부터 수염의 질감까지 표현했죠. 그런 것에 많이 영향을 받았습니다.”

‘한산’ 촬영이 특별한 건 바다에서 촬영하지 않은 해전 장면이다. 변요한은 적장인 이순신 장군 역의 박해일과는 거의 마주치지 못했다. CG로 모든 것이 구현되기 때문에 현장에서 집중력 있게 연기해야 했다.

“감독님이 새로운 시도를 굉장히 많이 했어요. 우리는 CG가 어떤 것이 들어오는지 다 계산을 해서 훈련했죠. 막상 현장에서 다 열심히 하니까 솔직히 어려운 부분이 없었어요. 서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런 에너지로 가야겠구나’ 생각했고요. 그런 걸 생각했을 때는 별반 다르지 않았어요. 더 믿음이 생겼어요. (박해일) 형도 절 믿어주신 것 같아요.”

감정 연기는 항상 어려운 부분이다. “이순신 따위”라는 말을 달고 살던 와키자카가 견내량부터 한산도까지 기세를 쭉 몰아가는 조선군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는 연기는 핵심 포인트였다. 열 가지가 넘는 표현법을 강구해 갔지만, 정작 실전에서는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전쟁에 나가기 위해 배를 타기 전이 어려웠어요. 한산대첩이 한 시간가량 이뤄지잖아요. 한 시간 동안 어떠한 비트로 잘 빌드 업을 시켜서 연기해야 하는지 매번 어려웠어요. 촬영에 들어갔을 땐 바로바로 하긴 했지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이렇게 확실하게 자신을 각인시킬 줄 아는 배우가 된 변요한은 데뷔 14년 차가 됐다. 자신을 쌓아온 시간 중 최근 3년간은 더 남다르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연기하며 다작 배우로 떠올랐다. 지난해에만 영화 ‘자산어보’부터 ‘보이스’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까지 세 작품이 개봉했다. ‘한산’ 이후로는 영화 ‘그녀가 죽었다’(감독 김세휘)와 드라마 ‘백설공주에게 죽음을’(극본 서주연/연출 변영주)가 차기작으로 준비돼있다.

“사실 (흥행 여부에 대한) 예상은 해요. 거리두기가 생기면서 예상을 했지만 그냥 같이 갔어요. 작품으로써 자신감이 있었거든요. (코로나 시기에) 두 작품을 하고 이번에 부산, 대구 무대인사를 다녀왔는데 관객들과 만나니까 정말 좋더라고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아서 하루에 소주 3병씩 마셨어요. 관객들이 많은 게 좋을 수밖에 없는 직업이잖아요.”(웃음)

“지치고 힘들 때도 있지만 연기하는 수명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려워요. 오래 연기하는 선배들이 대단하죠. 지쳤지만 끝까지 가는 게 대단해요. 전 수명이 정해졌는데 지쳐도 끝까지 나를 파면서 가는 게 맞는 선택인지, 아니면 쉬면서 하나하나 차분하게 고르면서 가는 게 맞는 선택인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제 성향은 그냥 가는 게 맞아요. 연기는 사랑이에요. 지치는데 사랑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