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잡아라!”
글로벌 경매회사 소더비가 서울사무소 설립을 준비 중인 가운데 크리스티와 필립스옥션은 한국 고객들을 위한 특별 기획전을 여는 등 ‘세계 3대 경매회사’가 한국 미술 시장에 공을 들이고 있다. 페이스·페로탕·리만머핀과 타데우스로팍·쾨닉 등 대형 글로벌 화랑이 한국에 진출한 후 세계 양대 아트페어로 자리 잡은 ‘프리즈’까지 서울 개최를 선언한 터라 한국은 명실상부 세계 미술 시장의 ‘폭풍의 눈’으로 부상하고 있다. 갤러리·아트페어·경매회사가 모두 한국을 주목하는 형국이 2000년대 중반 홍콩을 방불케 한다는 것이 미술계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9일 미술계에 따르면 크리스티코리아가 거장 프랜시스 베이컨과 아드리안 게니의 작품 16점을 선보이는 특별 기획전을 9월 3일부터 5일까지 서울 분더샵 청담에서 개최한다. 출품작 전체의 평가액만 약 4억 4000만 달러(약 5800억 원)를 호가하는 ‘블록버스터’급 전시다. 1995년 서울사무소를 연 이래로 크리스티가 판매(경매) 목적이 아닌 특별 전시를 기획해 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전시는 9월 1일 한국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세계적 아트페어 ‘프리즈 서울’을 겨냥하고 있다. 국내 주요 미술 애호가뿐 아니라 아시아 각국의 ‘큰손’ 컬렉터들이 서울을 방문할 것을 염두에 둔 전시 일정이기 때문이다. 엄선된 전시에 맞춰 기욤 세루티 크리스티 최고경영자(CEO)를 비롯한 주요 임원들이 한국을 방문한다. 이학준 크리스티코리아 대표는 “크리스티는 글로벌 경매사 중 유일하게 한국 고미술 전문 경매를 진행하고, 김환기·이성자·김창열 같은 한국 작가들이 크리스티 홍콩 경매를 통해 작가 최고가를 경신했다”면서 “최근 경매장에서 한국 고객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잠재적 가능성, 높은 수준을 확인했고 한국 미술 시장에 대한 크리스티의 지속적인 관심과 투자가 이번 전시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소더비와 크리스티에 비해 체급은 좀 작지만 젊은 고객층이 탄탄하고 트렌드에 민감한 필립스옥션도 서울에서 기획전을 연다. 다국적 유망 미술가 23명을 모아 ‘뉴 로맨틱’이라는 제목으로 이달 31일부터 9월 6일까지 서울 강남구 이유진갤러리에서 전시가 진행된다. 2017년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서울사무소를 연 필립스의 첫 대규모 기획전이다. 출품작은 다음 달 19일부터 필립스옥션홍콩 아시아 지사에서 판매될 예정이다. 필립스옥션 측의 한 관계자는 이번 전시 개최의 배경에 대해 “한국 미술 시장의 지속적인 성장세에 주목했다”면서 “지난해 한국 컬렉터들의 작품 수집 활동은 전년 대비 258%나 증가했다”고 말했다.
국내 경매회사들도 ‘지각변동’에 동참하고 있다. 신세계백화점의 ‘인수설’이 흘러나온 서울옥션(063170)의 경우 대규모 산업자본이 미술 시장으로 유입되는 결정적 계기로 주목을 끌고 있다. 가격 협상이 진행되는 가운데 최근 신세계 측이 서울옥션에 대한 실사를 재개한 것으로 확인됐다. 신세계백화점은 예술품 소비에도 적극적인 신규 고객 확보 및 유통 다변화를 위해 서울옥션 인수를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크리스티와 소더비 등 글로벌 경매회사의 최대주주는 대부분 명품 기업이다. 크리스티의 경우 미술품에 이어 전체 매출의 40%를 ‘럭셔리’ 분야가 차지하고 있다. 케이옥션(102370)은 올해 초 상장 이후 시장 투명화와 대체불가토큰(NFT) 진출 등 사업 확장에 팔을 걷어붙였다.
외국 경매회사가 한국으로 몰려드는 이유로는 ‘구매력’이 첫손에 꼽힌다. 또 하나는 ‘아시아 미술 시장의 허브’였던 홍콩의 위축 이후 새로운 거점 모색 의지가 작동했기 때문이다. 미술 시장 활성화를 위해 최근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기는 했지만 싱가포르는 여전히 7~10%에 달하는 세금 장벽이 높고 일본은 현대미술에 대해 보수적인 성향이 여전하다. 상대적으로 한국은 미술품 거래세가 없고 실험적인 현대미술에 호의적인 편이다. 김상훈 서울대 경영대학장은 “한국 미술 시장이 지난해 거래 총액 1조 원에 육박하는 성장세를 보였는데 글로벌 경매회사나 갤러리들의 경우 한국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 우세한 것으로 분석된다”면서 “컬렉터의 힘도 중요하지만 아시아 미술 시장의 거점 역할을 해온 싱가포르나 홍콩에 비해 한국은 풍부한 작가군이 있다는 것도 상당한 경쟁력일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한국은 1차 미술 시장인 갤러리와 2차 시장인 경매회사의 갈등이 상당한데 해외 갤러리와 경매회사의 국내 진출이 판도를 어떻게 바꿀지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