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시 펠로시의 코트에 불이 붙었다’
지난 2018년 12월 12일(현지시간). 뉴욕타임즈(NYT)의 기사 제목입니다. 당시 펠로시 하원 원내대표는 백악관에서 ‘앙숙’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만나 국경 장벽 설치 예산 문제를 놓고 엄청난 설전을 벌였는데요. 펠로시는 중간선거에서 승리해 하원의장 복귀를 앞두고 있던 살아있는 의회 권력이었습니다.
이 세기의 설전에 펠로시가 입고 간 코트가 바로 ‘막스 마라’의 빨간 코트입니다. 막무가내로 국경장벽 예산을 요구하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준 일종의 전투복인 셈입니다.
그가 하원의장으로 트럼프의 탄핵을 가결할 때 입은 건 검은색 드레스였는데요. 이 드레스는 ‘탄핵 드레스’라고도 불렸습니다. 워싱턴 정가의 파워 슈트로 불리는 그녀의 패션은 이렇게 예사롭지 않습니다. 자 그런 펠로시 의장이 이번에 대만 공항에서 내릴 때 입은 건 핑크색 바지 정장입니다. 펠로시 의장은 이 핑크색으로 무얼 말하고 싶었던 걸까요
트럼프 대통령의 국정연설문을 펠로시 의장이 찢는 장면은 쉽게 잊혀지지 않습니다. 당시에도 엄청난 화제를 모았지만 이번 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 권력서열 3위 펠로시 의장 대만 방문이 전 세계를 달군 지난 일주일이었습니다. 중국이 펠로시 의장의 방문에 대한 반발로 대만 해협에 미사일을 날렸구요. 이 가운데 일부는 일본 수역에 떨어졌습니다. 미국은 항공모함 전단을 인근에서 전개했습니다. 중국은 미국과의 군사 소통 채널과 기후 협상 중단 등 초강수를 뒀습니다. 자 이러다 보니까 워싱턴 정가에서는 펠로시 의장의 방문에 두 국가가 지출한 비용이 대체 얼마냐 이런 얘기까지 나왔습니다.
실제로 미국의 주류 언론에서도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습니다. 워싱턴포스트(WP)나 NYT 모두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이 조 바이든 행정부의 중국 정책 부담을 너무 높였다고 지적했습니다. 중국과 이 정도의 갈등까지 감수하고 대만을 가는 것이 굳이 필요했느냐, 본인의 과도한 정치적 욕심은 아니었느냐 이런 지적들이었습니다.
가뜩이나 미중 관계가 최악이고 글로벌 경제도 우울한 상황 입니다. 바이든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최근에 통화까지 하면서 어떻게든 타협의 실마리를 찾고 있는데 미국 권력 서열 3위 하원의장이 이런 행동이 세계 경제와 대만 시민들에게 도움이 되겠느냐라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수많은 논란들에도 불구하고 펠로시 의장이 대만을 방문한 이유를 미국 정치권은 두가지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첫째는 펠로시는 ‘펠로시’ 그 자체라는 겁니다
자 그녀의 인생을 보면요. 뼈대 있는 정치 가문에서 태어나 부동산 재벌과 결혼하고, 민주당을 위해 막대한 정치자금을 모으며 80세의 나이까지 하원 의장을 네 번을 했습니다. 그리고 곧 정계 은퇴를 앞두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아도 되는 압도적인 커리어와 관록입니다.
동시에 그의 정치 인생은 상당히 많은 부분이 중국 민주화와 인권 문제에 연결돼 있습니다. 그녀는 1989년 천안문 사건 당시에 정치 경력이 2년 밖에 안된 하원의원으로 중국 당국의 무력 진압을 비판하는 결의안을 주도 했습니다
그로부터 2년 뒤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는 천안문 광장에서 ‘중국 민주주의를 위해 숨진 이들에게’라고 쓰인 현수막을 펼쳐 한바탕 소란을 빚었습니다. 중국은 그때부터 펠로시를 기피 인물, 이른바 페르소나 논 그라타'(외교적 기피인물)로 분류 했습니다.
펠로시 의장이 이번에 대만에 가면서 던진 출사표. WP에 기고했죠. ‘내가 의회 대표단을 대만으로 이끄는 이유’ 여기에서도 그는 조목조목 중국의 인권문제를 지적했습니다. 중국이 홍콩을 탄압하면서 일국양제를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했구요. 티베트의 문화적 유산들을 지우고 신장 위구르에서 대량 학살을 하고 있다고 시 주석을 직격했습니다.
펠로시의 정치는 이렇게 ‘직진’입니다. 동시에 그는 인권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봅니다. 의도를 했건 안했건 간에 펠로시 의장이 대만에 갈 때 입은 핑크색 정장을 두고 CNN은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중국에 대한 호전적 태도보다는 대만에 대한 또 그들의 인권에 대한 우정을 핑크색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마지막 정치 여정에서 ‘자유와 인권 문제를 위해 싸운 여성 정치인’이라는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사태에서 그녀가 워낙에 주목을 받다 보니 10년 만 젊었어도 대통령에 나왔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왔습니다
자 두 번째는요. 좀 더 큰 그림입니다. 이게 결국 미국의 대만 정책 변해가는 하나의 과정이 아니냐는 겁니다. 펠로시의 방문은 그 상징적 모멘텀일 수 있습니다.
물론 바이든 행정부는 펠로시 의장을 말렸습니다. 대만 방문을 만류하는 수차례의 기밀 브리핑이 있었습니다. 또 여전히 ‘하나의 중국 원칙’을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군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서 대만 방문에 사실상 반대 의사를 표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미국 의회의 움직임을 보면 미국의 대만 정책은 이미 변해가고 있습니다. 당장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을 두고 숙적인 공화당 의원 26명이 지지 성명을 냈을 정도로 대만 정책에 대한 미국 의회의 움직임은 더 강경해지고 있습니다
지난 6월에 민주당에 밥 메넨데스 상원 외교위원장이 공화당의 린지 그레이엄 의원이 함께 발의한 대만정책법. 이것도 최근 미국 의회에서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는데요.
내용은 사실상 미국의 대만에 대한 ‘전략적 모호성’ 정책을 폐기하자는 겁니다. 대만을 비(非)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동맹국으로 지정하고 수조원 규모의 안보지원을 하자는건데요. 민주당 출신 상원 외교위원장이 공화당 의원과 함께 이걸 발의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파장은 이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자 그래서 펠로시 의장의 방문은 미국이 사실상 연출한 작품이 아니냐 이런 음모론도 나옵니다. 대만 정책을 바꿔가는 과정에서 중국의 반응을 떠보기 위한 총대를 펠로시 의장이 맸다는 겁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입니다.
자 이유야 어찌됐든 펠로시 의장의 만든 대만해협의 파고는 쉽게 진정될 것 같지 않습니다. 펠로시 의장은 스스로 역사의 한 장을 썼지만요 그 역사의 다음 페이지가 어찌될 지 불안감은 너무 커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