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암 치료 주사제를 국내로 들여와 3번 맞는 데 8000만 원이 듭니다. 집을 포함해 가진 것을 다 팔아 치료비를 충당해 왔지만 더 이상은 한계입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 직후인 6월 국회 국민동의청원 게시판에 이런 사연이 올라왔다. 청원인은 인천에 거주하는 70대 여성 암환자다. 청원인은 "2015년에 유방암을 진단 받고 7년간 생사를 오가며 수많은 항암치료를 받았다"며 "이제 한가지 수입약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호소했다. 게다가 그 약은 아직 국내 승인을 받기 전이라 한국희귀필수의약품센터를 통해 수입되고 있었다. 청원인은 "모든 선진국이 사용하는 약으로 가까운 나라 일본에서도 보험이 적용된다"며 "우리나라에서도 수입과 의료보험 적용돼 많은 암환자를 구해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했다. 이 청원은 한달간 1만 4000여 명의 지지를 받았지만 '30일 이내 5만 명 동의' 기준에는 미치지 못한 채 종료됐다.
청원글에 등장한 고가의 유방암 치료제는 일본 다이이찌산쿄와 영국 아스트라제네카가 공동 개발한 '엔허투(성분명 트라스투주맙 데룩스테칸)'다.
미국에서는 이미 2019년 판매 허가를 받아 판매를 시작했다. 유럽, 일본 등 주요 국가에서도 허가를 받았다. 미국식품의약국(FDA)이 지난 3년간 엔허투 처방 대상으로 허가한 적응증은 △HER2 양성 전이성 유방암 △HER2 양성 진행성 위암 △HER2 저발현 전이성 유방암 등 3가지다. 미국에서는 HER2 단백질을 타깃하는 표적항암제를 포함해 2가지 이상의 약제를 쓰고도 효과를 보지 못한 HER2(사람상피세포증식인자수용체 2형) 양성 전이성 유방암 환자에게 엔허투를 처방할 수 있다. FDA 허가 근거가 된 DESTINY-Breast01 임상 2상에 따르면 엔허투는 전이성 유방암 환자에서 60.9%의 반응률(ORR)을 나타내며 일차유효성평가지표를 충족했다. 종양이 일정 크기 이상으로 커지지 않고 환자가 생존한 기간을 뜻하는 무진행생존기간(PFS)은 16.4개월(중앙값)로 집계됐다. 이어진 3상 임상에서는 기존 표준치료제를 압도하는 효과를 보이며 HER2 양성 유방암 2차 치료제로 한단계 올라선 상태다.
HER2 저발현 전이성 유방암에 대한 엔허투 투약 효과의 경우 올해 열린 미국임상종양학회(ASCO 2022)에서 획기적인 임상 결과가 공개돼 기립 박수를 받았다. Destiny-Breast04 임상 결과에 따르면 엔허투를 투여받은 HER2 저발현 유방암 환자의 무진행생존기간(PFS)은 9.9개월(중앙값)로 항암화학요법군의 5.1개월보다 2배가량 연장됐다. 질병 진행 및 사망 위험은 50% 감소시켰다. 전체생존기간(OS)은 엔허투 투여군이 23.4개월(중앙값), 항암화학요법군이 16.8개월로 사망 위험을 약 36% 낮췄다.
유방암 환자에서 HER2 과발현 여부는 HR(호르몬수용체)과 함께 항암치료 반응을 예측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인자로 꼽힌다. 그동안 '허셉틴(성분명 트라스투주맙)', '퍼제타(성분명 퍼투주맙)' 등의 표적항암제가 등장하며 생존율이 높아진 HER2 양성 유방암과 달리, HER2 단백질 발현도가 낮은 유형의 유방암 환자에겐 마땅한 치료제가 없었다. HER2 음성 소견을 보이는 환자가 전체 유방암의 약 60%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지만 내분비요법 또는 항암화학요법으로 치료하다 보니 좋은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었던 상황이다. 이에 따라 FDA는 개발사가 HER2 저발현 유방암에 관한 적응증 추가를 신청한 직후 엔허투를 신속심사 대상으로 지정하고, 12일 만에 승인 결정을 내리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 업계를 놀라게 했다. 이번 승인을 계기로 유방암 치료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뀔 것이란 기대감도 제기된다.
엔허투가 암종과 변이 유형을 불문하고 놀라운 효과와 안전성을 보이는 비밀은 이 약의 작용 기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엔허투는 암세포 표면에 발현되는 특정 단백질을 정밀하게 표적하는 ‘항체(Antibody)’에 강력한 세포사멸 기능을 갖는 ‘약물(Drug)’을 링커로 연결한 항체약물접합체(Antibody Drug Conjugate·ADC)다. ‘유도미사일’인 항체에 ‘핵탄두’인 항암제를 결합시켜 암세포를 추적해 파괴하는 개념으로, 강력한 암세포 사멸효과를 나타내면서도 부작용을 최소화 했다. 링커 기술의 발전으로 항체에 약물을 안정적으로 부착할 수 있게 되면서 1세대 ADC '캐싸일라(성분명 트라스트주맙 엠탄신)'보다 업그레이드된 2세대 ADC라고 평가받는다.
국내에서도 곧 엔허투 투여가 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 엔허투의 국내 판권을 보유한 한국다이이찌산쿄는 허가 심사에 필요한 서류 제출을 완료하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지난해 6월 엔허투를 신속심사 대상으로 지정한 상태다. 올 하반기 중 엔허투 허가가 가능할 것이란 기대감이 제기된다. 김민환 연세암병원 종양내과 교수는 “한국희귀의약품센터를 통해 엔허투를 공급 받으면 비용 뿐 아니라 의약품 품질 등의 관리에도 허점이 생길 수 있다"며 "기존 약제에 내성이 생겨 다른 선택지가 없는 유방암 환자들을 위해 규제기관의 허가를 통한 정식 도입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안경진 기자 realglasses@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