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 경제부장
4월 TSMC의 창업자 모리스 창(장중머우)이 미국 브루킹스연구소를 대상으로 강연을 했다. 그는 미국이 칩 제조를 본토에서 하려는 시도에 대해 “낭비적인 헛수고”라고 비판했다.
장중머우는 미국에서 생산되는 칩의 제조 단가가 대만에서 만드는 것보다 50% 더 비싸다는 점, 미국이 수십 년간 제조에 손을 놓은 까닭에 공정 엔지니어가 태부족이라는 점을 또 한 번 지적했다. 미국에서 만드는 칩의 글로벌 경쟁력이 없다는 것이다. 제조 시설을 미국에 두기 위해 520억 달러를 쏟아붓는다는 ‘칩스’ 법안에 대해서도 1개 라인에 10조~12조 원 이상을 투자하는 반도체 산업에서는 현실을 잊게 만드는 일종의 모르핀이라고 평가절하했다.
미 주도의 반도체 공급망 협의체 ‘칩4’의 핵심 국가인 대만에서 ‘반도체의 대부’로 불리는 장중머우가 왜 이런 쓴소리를 할까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장중머우는 지금 진행 중인 미국의 자체적인 공급망 구축 시도가 실패로 판명되지 않으려면 역설적으로 중국과 대만 사이에 전쟁이 발발해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말해왔다. 전 세계에서 가장 첨단화된 칩의 90% 이상이 대만에서 만들어지는 상황에서 양안 간에 전쟁이 없으면 미국의 모든 노력은 엄청난 자본 낭비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양안 관계의 불안감 때문에 팹을 미국에 유치하지만 이게 성공하려면 대만해협에서 전쟁이 나야 하는 모순적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는 논리다.
흔히 반도체는 석유와 비교된다. 20세기 가장 중요한 경제적 요충지가 전 세계 석유를 실어 나르는 중동 호르무즈해협이었다면 이제는 전 세계 칩을 만드는 한국과 대만이 냉전의 발화점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반도체는 이제 전쟁과 떼 놓고 생각할 수 없는 전략물자가 됐다. 반도체가 원가 개념에 정치 논리가 맞물려 작동하는 산업으로 변모했다는 의미다.
다시 한번 정치가 침윤하고 있는 반도체 시장을 보자. 장중머우는 반도체가 미중 간 새 격전지가 되기 전까지 반도체 시장에 통용되는 규범과 질서를 만들어온 대가다. ‘설계의 미국, 제조의 대만’이라는 공식은 장중머우가 평생을 걸쳐 직조한 반도체 시장의 구조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TSMC를 세계 최고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제조)로 키우는 데 미국 일류 팹리스(반도체 설계)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그런데도 장중머우가 미국에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것은 ‘환경이 송두리째 바뀐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것은 결국 기업’이라는 점을 새삼 환기시킨다. 최근 시장에서는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10㎚(나노미터·1나노는 10억분의 1m) 이하 칩을 양산도 하지 못할 만큼 망가진 인텔이 파운드리에 뛰어들었다. TSMC와 삼성전자가 미국 정부의 팔 비틀기에 미국행을 단행하고 있는데도 미국 정부는 인텔을 자국 대표로 소환했다. 이는 칩4로 동맹을 하나로 묶는 것과 개별 기업 간에 경쟁은 전혀 다른 차원의 현실임을 냉정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팹의 유치는 미국만의 지상 과제는 아니다. 유럽과 일본 등을 위시한 아시아도 자기 땅에 팹을 짓기 위해 보조금으로 파운드리에 호객 행위를 해왔다. 문제는 이런 제조 투자 붐이 하필 칩의 과잉 수요를 초래한 코로나19라는 역병과 맞물려 우후죽순 이뤄졌다는 점이다. 실제 반도체 조사 기관 세미는 최근 2년간 세계적으로 30개 가까운 신규 팹이 착공돼 내년부터 과잉 공급을 유발할 수 있다는 취지의 보고서를 냈다.
유례가 없을 만큼 길었던 반도체의 화려한 날도 끝나가고 있다. 이번 반도체의 겨울은 예전보다 더 혹독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정치적 개입이 많았고 그 결과 호황 시절에는 생각지 못했던, 아니면 애써 외면했던 부작용이 불쑥불쑥 나타날 수 있다. 기업의 진짜 실력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썰물이 지면 누가 분위기에 편승해 홀딱 벗고 수영했는지 알려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