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2월 27일 미국 뉴욕타임스가 ‘외국 바이어가 먹기에 한국 기업들이 알맞게 익었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자존심이 꺾인 한국은 국민적 자존심이 상하는 일을 당하고 있다. 그것은 미국을 비롯한 외국 자본에 의해 기업이 인수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가와 통화가 수직 낙하하면서 한국 업체들은 외국 기업의 잠재적 매매 대상이 되고 있다.”
그 이틀 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도 비슷한 내용의 기사를 게재했다. “거대한 공룡과 같은 한국 재벌들이 과도한 빚더미에 짓눌려 죽어가고 있다. 한국 기업들은 주가 폭락 등으로 헐값에 팔리게 됐다. 한국 증시의 시가총액이 66조 원으로 글로벌 시가총액 세계 70위 업체인 네덜란드의 ING그룹 수준에 불과하다.”
한국은 외환 위기로 알토란 같은 기업과 은행들을 외국 자본에 넘겨야 했다. 미국 등 해외 기업들은 우리 기업사냥에 나서 떼돈을 벌었다. 한국의 위기가 외국 자본에는 싼값에 좋은 물건을 사들일 절호의 기회였던 셈이다. 2011년 그리스·스페인·포르투갈 등 유럽 국가들도 유사한 수모를 당했다. 미국 기업과 사모펀드가 유럽의 재정 위기를 틈타 유럽 금융기관과 기업들이 내놓은 자산을 헐값에 낚아채 갔다. 그 규모는 최대 3조 달러에 달한 것으로 추산됐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대다수 기업은 생존을 위해 몸을 잔뜩 움츠린다. 그렇다고 모든 기업이 위기 뒤에 숨어 태풍이 지나가기만 기다리지 않는다. 상당수 기업들은 ‘위기 속에 기회가 있다’면서 눈을 부릅뜨고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인다. 그동안 눈여겨보지 않았던 시장에서 기회를 찾기도 한다. 경기 침체 우려가 높아지고 긴축 바람이 거센 최근에도 미국 빅테크 기업과 투자 회사들은 과감한 인수합병(M&A)에 나서고 있다. 기업 몸값이 떨어진 상황을 미래 먹거리를 준비하는 ‘기회의 시간’으로 삼는 것이다.
5월 미국 통신사 브로드컴은 클라우드 소프트웨어 회사 VM웨어를 610억 달러(80조 원)에 인수했다. 같은 달 미국 반도체 업체 AMD는 데이터 분산 서비스 업체인 펜샌도를 19억 달러에 매수했다. 세계적인 컨설팅사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는 이런 움직임을 “경기 악화로 기업 가치가 하락하자 이를 수익을 창출할 좋은 기회로 보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미국에서 ‘세계 1등’ 기업이 꾸준히 나올 수 있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기술력을 갖춘 스타트업이나 중소·중견 업체를 자본력이 있는 기업들이 사들여 새 성장 동력으로 키우기 때문이다.
한 달 전 블룸버그통신이 반(反)시장 정책과 지정학적 갈등 우려에 중국을 떠난 글로벌 투자 자금이 한국 등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실제 올해 7월 기준 세계 신흥 시장 주식·펀드의 중국 시장 비중은 3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씨티그룹도 최근 보고서에서 “고객들이 중국 시장 비중을 놀라울 정도로 낮췄다. 대신 한국과 인도에 초점을 맞춘다”고 전했다. 글로벌 투자사인 칼라일그룹은 85억 달러(약 11조 2000억 원) 규모의 아시아투자펀드에서 중국 비중을 줄이고 한국·인도 등의 포지션을 높이기로 했다. 중국을 빠져나오고 있는 글로벌 자본이 한국을 대안 투자처로 여기는 것이다.
지금 한국 경제는 복합 위기에 직면해 있다. 하지만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도 기회의 요인을 모색해야 한다. 특히 요즘처럼 기술이나 시장 상황 변화가 빠른 시기에 M&A는 생존의 필수 조건이 됐다. 새로운 성장 동력을 발굴하고 과학기술 초격차 확보를 위해서도 그렇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려면 기업과 기업인들의 신산업 도전과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 회복이 필요하다. 최근 광복절 특사로 사면·복권된 기업인들의 어깨가 무거운 이유다. 첨단 산업 분야에서 담대한 투자와 M&A를 통해 한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기업만의 노력으로는 부족하다. 정부가 규제 혁파와 세제 지원 등으로 도와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