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 본사에 한국의 상황을 보고할 때는 더 이상 ‘갑질’을 영어로 번역하지 않아요. 한국에서 구글과 관련된 소식들은 일단 ‘갑질’ 프레임으로 포장돼 유포되기 때문이죠. 구글 본사 관계자들도 이제는 한국어로 ‘갑질(gabjil)’이라고만 써도 금세 알아먹는 거죠.”
얼마 전 만난 구글코리아 관계자의 푸념 섞인 말이다. 구글이 그만큼 국내 플랫폼 시장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구글은 세계 최고 수준의 인공지능(AI)·빅데이터·클라우드 경쟁력을 제쳐 놓고도 외형상 시가총액이 1077조 원, 직원 수 17만 명, 지난 분기 매출만 690억 달러에 이른다. 유튜브는 구독자가 10만 명 이상인 채널을 5500개나 보유하고 있다. 큰 덩치만큼 영향력도 절대적이다 보니 최근에 불거진 ‘인앱결제’ 문제처럼 관련 업체들의 이해에 따라 논란의 도마에 오르기 일쑤다.
메타(옛 페이스북) 역시 마찬가지다. 국내 통신 업체와 수수료를 둘러싸고 법정 다툼을 이어가고 있다. 1심에서는 국내 통신사의 손을 들어줬지만 마지막에 누가 웃을지는 두고 봐야 한다. 넷플릭스도 엄청난 자금력을 바탕으로 국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시장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어 지켜 볼 일이다.
구글, 페이스북, 넷플릭스. 4차산업 혁명 시대의 최선두에 선 그야말로 글로벌 공룡이라는 이름이 걸맞은 빅테크 기업이다. 네이버와 카카오를 위시로 한 국내 플랫폼 업체와 통신사들은 국내에서는 또 다른 ‘갑질’과 ‘골목대장’ 지적을 받곤 하지만 이들에 비하면 함선과 돛단배 차이다. ‘K플랫폼’이 이들에 당당히 맞서 국내외에서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시기상조다.
다행히 음악과 영화·웹툰·게임 등 많은 K콘텐츠들이 이제 막 글로벌 시장으로 뻗어가기 시작했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으라는 말처럼 이 흐름을 가속화하기 위해서는 나보다 더 힘센 이의 등에 올라타는 전략도 필요하다. 빅테크를 포식자로 규정하고 지나친 ‘자국주의’에 매몰돼 무작정 부정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이들의 네트워크와 영향력을 이용해 점프할 수 있을지 머리를 싸매야 한다. 글로벌 빅테크들과 경쟁적 협력 관계, 즉 ‘코피티션’이 필요하다. 실제로 구글과 인앱결제 갈등 속에서 글로벌 전략을 위해 서둘러 문제를 타결한 네이버의 행보가 이를 잘 대변해준다.
며칠 전 구글코리아가 한국에서의 상생을 내보이기 위해 개최한 ‘구글 포 코리아’ 행사에 구글 측과 첨예한 갈등을 겪던 카카오엔터테인먼트의 대표가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카카오 측은 “따질 것은 따지고 협력할 것은 협력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실사구시(實事求是), 현명한 자세다.
각 나라의 콘텐츠는 이제 유튜브 등을 타고 글로벌 소비재가 됐다. 디지털 시대에 더 이상 ‘변방’ ‘비주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BTS가 그렇고 미나리·기생충 등 한국 영화 등이 잘 말해 준다. 우리 온라인게임은 한 해 10조 원어치를 수출하는 반열에 올랐다. 이제 개화를 시작한 웹툰은 올해 상반기에만 거래액 2조 원 가운데 70%를 해외에서 거뒀다.
전 세계에서 자국의 검색 플랫폼을 갖고 있는 나라는 미국·중국·러시아, 그리고 한국뿐이다. 그만큼 네이버·카카오 역시 소중한 정보기술(IT)이며 대한민국의 자산이다.
모든 산업이 그렇듯 플랫폼 시장 역시 소비자의 최종적인 이익을 담보할 수 있는 공정 경쟁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K콘텐츠의 글로벌 영토 확장을 위해서는 글로벌 빅테크들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 생각하는 ‘실사구시’의 영악함 역시 필요하다.
외국 기업이라고 특별히 선호할 것도, 무턱대고 밀어낼 필요도 없다. ‘갑질’로 소비자의 이익을 해친다면 철퇴를 내리고 한편으로는 그들의 등에 올라탈 기회도 만들어야 한다. 세계경제 10위권에 오른 한국은 이제 그럴 만한 위치가 됐다. 과거 국내에 진출한 글로벌 기업을 마녀사냥하듯 터부시하던 시대는 갔다.
어리석은 이는 힘센 자들을 부정한다. 하지만 현명한 이는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 고민한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글로벌로 가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글로벌이 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