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경기 침체 우려 등 대내외 악재가 산적한 가운데 국내 주요 그룹 총수들이 잇따라 해외 출장길에 올라 현지 사업 점검에 나섰다.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안(IRA) 및 반도체지원법, 칩4 동맹 참여 등으로 경영 환경이 급변하면서 현지 사업 계획도 대거 변경해야 할 상황에 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24일 산업계에 따르면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전날 김포국제공항에서 전용기를 타고 미국행 출장길에 올랐다. 올해 들어서만 네 번째 미국행이다. 행선지는 뉴욕이나 워싱턴DC·조지아주 등이 유력하다. 정 회장은 귀국 일정도 따로 잡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귀국 일정이 없는 만큼 최소 일주일 이상 머무를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번 출장에는 대관 업무를 총괄하는 공영운 현대차 사장이 동행한 것으로 볼 때 미국 정·재계 인사를 만나 IRA 관련 논의를 할 가능성이 높다. 최근 IRA 법 시행으로 현대차그룹의 전기차 구매자는 최대 1000만 원에 달하는 전기차 보조금 혜택에서 제외됐다. 현재 미국에서 판매되는 현대차그룹 전기차는 전량 국내에서 생산되고 있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차그룹은 미국 전기차 시장에서 테슬라에 이어 점유율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앨라배마 현대차 공장이나 조지아에 방문할 가능성도 있다. 현대차그룹은 IRA 시행에 대응해 조지아주 전기차 전용 공장 완공 시기를 2025년 상반기에서 2024년 하반기로 앞당기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최소 2년 이상 보조금 혜택을 받을 수 없어 앨라배마공장 내 생산 설비를 전기차 전용으로 탈바꿈시키는 방안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는 올해 12월부터 앨마배마공장에서 제네시스 G70 전기차를 생산할 예정이지만 이 공장의 주력은 여전히 싼타페·투싼·아반떼 등 내연기관 차량이다. 앞서 정 회장은 최근 방한한 팻 윌슨 조지아주 경제개발부 장관과 양재동 본사에서 회동하고 전기차 전용 공장 조기 착공과 관련한 의견을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현대차그룹은 조지아주에 기아 공장도 운영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앨라배마나 조지아주공장 생산라인 일부를 전기차 라인으로 전환해 아이오닉 5·6나 EV6를 생산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8·15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사법 족쇄를 푼 신동빈 롯데 회장은 첫 해외 출장지로 베트남을 택했다. 다음 달 베트남 호찌민에서 열리는 신도시 기공식에 참석한 후 현지 유통 사업을 둘러볼 예정이다. 롯데건설은 호찌민의 신도시 투티엠에서 대형 복합 단지인 투티엠 에코스마트시티를 건설하고 있다.
신 회장이 특별사면된 후 첫 해외 출장을 베트남으로 가는 데는 여러 계열사가 투자를 확대하고 있는 동남아의 현지 사업을 직접 점검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됐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의 직격탄을 맞았던 롯데는 2017년부터 ‘탈(脫)중국’을 본격화하며 동남아를 그 대안으로 내세웠다. 이후 롯데마트·롯데호텔·롯데면세점 등 유통 계열사는 베트남에서 매장과 점포를 꾸준히 늘리며 사업을 강화하고 있다. 현재 19개 계열사가 베트남에 진출해 있으며 1만 명이 넘는 임직원이 현지에서 근무하고 있다. 앞서 신 회장은 유럽 전기차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6월 헝가리·아일랜드 등을 찾아 양극박 생산 규모를 늘리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복권 이후 첫 해외 출장지로 미국 등이 거론된다. 삼성전자는 현재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 파운드리공장 착공식, 시스템 반도체 인수합병(M&A) 추진 등 해당 지역 현안이 산적해 있다. 재계에서는 그 시점을 이르면 다음 달 추석 연휴께로 보고 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재판이 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