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및 ‘반도체지원법’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 ‘원팀’ 구성에 나선다. 또 세계무역기구(WTO)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규범 위반 여부를 들여다보는 한편 유럽연합(EU) 등 주요국과의 공조도 강화한다. 국내 반도체·전기차·배터리 기업들은 정부가 미국과의 협상에 적극 나서는 한편 해외 광물 확보에도 보다 힘을 쏟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25일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차·기아,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 업계 관계자들과 IRA 및 반도체지원법 대응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반도체지원법은 미국 내에서 반도체 신규 투자를 진행하는 기업에 재정 지원 및 투자세액공제를 제공하되 향후 10년간 중국에 신규 투자를 할 수 없도록 제한한 ‘가드레일’ 조항을 담고 있다. IRA는 전기차 보조금 지급 기본 요건을 ‘북미에서 최종 조립된 전기차’로 한정했으며 중국산 광물을 사용한 전기차 배터리에도 보조금 지급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았다. 해당 법안 시행으로 한국의 핵심 산업인 반도체·배터리·전기차 모두 막대한 타격이 불가피하다.
이에 정부는 통상정책국장을 팀장으로 하는 합동 대응반을 구성하고 통상 규범 검토 및 미국 의회·행정부 접촉 등으로 문제 해결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또 반도체지원법 가드레일 예외 조항에 낸드플래시와 같은 범용 반도체 설비가 포함되는 만큼 우리 정부는 관련 사안을 미국 상무부와의 협의 시 십분 활용하다는 방침이다. 이 장관은 이날 간담회 직후 기자들과 만나 “미국을 직접 방문해 협상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며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는) 유럽·일본 등과 비교하면 우리 대응이 가장 빠르고 적극적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IRA와 관련해 국제기구에 문제 제기를 하는 한편 다른 국가들과 공동 대응 전선도 구축한다는 방침이다. 정부는 앞서 미국 무역대표부(USTR) 측에 IRA가 WTO 협정 및 한미 FTA 등 국제 통상 규범에 위배될 수 있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또 EU 등 관련 법 통과로 타격이 예상되는 국가들과의 공동 대응 방안도 모색한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KAMA)는 유럽자동차공업협회(ACEA)와 다음 달께 IRA 관련 공동 입장문을 발표할 예정이다. 다만 정부는 국제법을 내세워 미국 측을 압박할 경우 부작용이 더 클 수 있다는 판단 때문에 양자 간 협의에 우선 힘을 준다는 방침이다.
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기업들은 미국 측에 요구해야 할 사항을 봇물처럼 쏟아낸 것으로 전해졌다. 이 가운데 반도체 업계는 최근 미 의회가 통과시킨 반도체 지원법의 가드레일 조항에서 낸드플래시는 예외로 해줄 것을 미국 정부에 요청해달라고 요구했다. 현재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 SK하이닉스는 다롄에 각각 낸드플래시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시안공장은 삼성전자 전체 낸드플래시 생산량의 40%를 차지한다.
자동차 업계는 미국에 전기차 공장을 투자하는 기업의 경우 ‘북미 공장에서 조립된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규정을 한시 유예해줄 것을 미국에 요청해달라고 호소했다. 현재 현대차그룹은 조지아에 전기차 전용 공장을 짓고 있다. 당초 2025년 상반기 완공이 목표였으나 IRA 통과로 완공 시기를 2024년 하반기로 앞당기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현행 IRA 대로라면 2년간 보조금을 받지 못하게 된다. 자동차산업협회는 이날 성명을 내고 “IRA 발효로 미국 전기차 시장점유율 2위인 한국산 전기차가 보조금 혜택을 받지 못하면 매년 10만여 대의 전기차 수출 차질이 발생하고 전동화 전환을 추진 중인 부품 업계도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배터리 업계는 문재인 정부에서 중단된 해외 광물자원 개발에 정부가 적극 나서거나 지원해야 한다고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내 배터리 3사는 미국에 다수의 공장을 투자하고 있어 IRA의 수혜를 받을 것으로 예상되나 광물의 중국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IRA에 따라 전기차 보조금을 받기 위해서는 미국이나 미국과 FTA를 맺은 국가에서 채굴 및 제련한 배터리 광물 비중을 2024년 40%, 2027년 80%까지 확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배터리에 장착되는 주요 부품 역시 북미 생산 비중을 2023년 50%, 2029년 100%까지 확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