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십자각] 기업 지원하겠다는 초심은 어디로 갔나

윤경환 산업부 차장


“윤석열 정부가 ‘기업 초심’을 잃는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최근 기자와 만난 한 기업인은 현 정부에 대한 세평을 먼저 묻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정부의 기업 정책에 대해 한숨을 쉬는 기업인이 부쩍 늘었다. 기업들을 옭아매는 규제를 없애고 투자와 고용하기 좋은 여건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는데 실천 의지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와 미중 갈등에 따른 공급망 불안, 글로벌 인플레이션, 금리 인상, 환율 급등 등 기업들이 처한 현실은 어느 때보다 엄중하고 엄혹하다.


윤석열 정부는 취임과 동시에 강한 국정 동력을 확보하고 경제·안보 문제 해결에 앞장섰어야 했다. 글로벌 질서 재편의 기로에서 한국이 갈 길을 명확히 제시하고 미래 먹거리에 대한 청사진을 내놓았어야 했다. 10대 그룹이 5월 1000조 원(5년간)이 넘는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한 것은 정부의 기업 정책에 대한 믿음 덕분에 가능했다.


정부가 최근 보인 행보는 기업들 입장에서는 수긍하기 힘든 면이 많다. 기업들에 약속했던 초심이 시간이 지나면서 희석되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내비치는 기업인도 있다. 경제 살리기에 매진해도 모자랄 판에 이전 정부의 실패 방정식을 답습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국민 신뢰를 바탕으로 국정 동력을 얻어야 하는데 김건희 여사와 관련한 구설과 사적 채용 의혹, 인사 난맥상까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집권 여당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윤핵관(윤석열 핵심 관계자)’과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볼썽사나운 갈등을 빚으면서 야당과의 협치 방안도 찾지 못하고 있다.


특히 정부가 지난달 14일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착공식을 돌연 미룬 일은 기업들에 나쁜 신호를 준 대표 사례로 꼽힌다. 용인 클러스터는 SK하이닉스가 120조 원이나 투자하는 반도체 대계(大計)다. 각종 규제로 3년이나 착공이 늦춰지고 있다. 기업들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 의지가 있는지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규제 개혁 1호’ 방안인 대형마트 영업시간 제한 완화 공언도 한 달 만에 후퇴하고 말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달 3일 서울을 방문한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을 만나지 않은 점도 재계에 혼란을 줬다. 대기업들은 5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방한과 한미정상회담을 계기로 자유 진영 중심의 공급망 구축과 대규모 대미(對美) 투자에 속도를 내던 참이었다. 삼성·SK·현대차·LG 등은 미국 현지 기공식도 대대적으로 열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외교적 계기를 마련해 주지 못한 탓이다.


경쟁국들이 자국 첨단 산업 육성에 천문학적인 지원을 퍼붓는 사이 한국에서는 소수 여당의 무관심, 거대 야당의 비협조 속에 기업 활성화 법안들이 잠만 자고 있다. 최대 수출 효자 종목인 메모리반도체의 시장 성장률은 내년 0%대까지 떨어질 위기에 처했다.


이른바 ‘보수 콘크리트’만 남은 30% 안팎의 지지율로 윤 대통령이 난국을 돌파할 수 있다고 보는 기업은 없다. 한때 국가 예산보다 더 많은 투자를 약속했던 기업들은 벌써부터 이를 지연·취소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정부의 정책 추진력과 일관성, 영속성에 대한 신뢰가 그만큼 떨어졌다는 방증이다.


정부와 여당은 지금이라도 정쟁과 거리를 두고 산업계의 목소리를 더 들어야 한다. 윤핵관 같은 작은 집단만 믿고 미래를 모두 맡기려는 기업이나 국민은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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