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론직설]오세정 서울대 총장 "선도국 쫓아가는 관행 여전…실패 용인하는 풍토 먼저 만들어야"

■오세정 총장 인터뷰
'패스트 팔로어'서 '퍼스트 무버'로 연구 패러다임 전환
대학 복수전공·부전공 확대 통해 도전적 인재 양성 필요
논문 중심 R&D평가 벗어나 아이디어로 기술 패권 대비
정치권은 당파성에 집착 말고 국익 앞세운 정책 발굴을

오세정 서울대 총장이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빠른 추격자에서 벗어나 선도자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사진 제공=서울대

고광본 선임기자


“한국은 선도국을 빨리 쫓아가는 것은 잘합니다. 하지만 남들이 안 하는 것에 뛰어들기를 두려워합니다. 여기서 벗어나야 노벨상을 받을 수 있고 영향력이 큰 기술 사업화도 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세정 서울대 총장은 최근 한미과학기술학술대회(UKC)가 열린 미국 워싱턴DC의 한 호텔에서 가진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연구개발(R&D)이나 사회 시스템 등을 보면 ‘미국이나 일본 등 다른 나라는 어떻게 했어’라고 묻고 우리 사정에 맞춰 변형해 적용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 “미국 등 과학기술 선도국은 퍼스트 무버(선도자) 연구에 가산점을 주지만 우리는 패스트 팔로어(빠른 추격자)를 자초하게 만든다”며 “처음 하면 실패 확률도 높지만 선도국으로 거듭나려면 새로운 것을 과감히 시도하고 실패를 용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미 간 과학기술 분야의 교류 활동은 어떻게 보나.


△미국도 한국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특히 기술 패권 시대를 맞아 과학기술의 영역이 창업과 경제, 외교·안보 등으로 확대됐다. 한미 간 과학기술 파트너십을 모색해야 할 때다. 다만 재미 한국계 과학기술인들이 모국과의 상생을 추구하며 역할을 많이 해주면 좋은데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듯하다.


-국내 과학기술 지원 기관과 미국 기관과의 조직적인 협력도 미흡한데.


△미국 기관들은 시너지를 원하는데 우리가 잘 맞추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각 기관 간 협정을 통한 여러 R&D 프로그램이나 인력 교류가 현실적으로 원활하지 않다. 그나마 기초과학 분야의 협력은 좀 나은 편이다.



오세정 서울대 총장이 올 1월 '서울대 새내기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강연하고 있다.

-대학 얘기를 해보자. 서울대 총장을 3년 반가량 했는데.


△국내 대학은 아직도 선진국을 벤치마킹하고 따라가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를 뛰어넘을 정도의 새로운 시도를 찾아보기 어렵다. 삼성은 재빨리 변화해 일본 소니를 이겼다. 하지만 대학의 변화는 너무 느리다. 이제 남을 따라하는 것은 한계에 직면했다. 새로운 시도를 진취적으로 해야 하는데 대학 시스템이 허용하지 않는다. 자원도 별로 없다. 노벨상을 받으려면 새로운 것을 처음 해본 사람을 교수로 뽑아야 한다. 그런데 논문 수와 인용도를 본다. 테뉴어(65세 정년 보장 교수)가 되면 내보낼 수 없다.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선진국의 대학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총장으로서 주로 무슨 노력을 했나.


△무엇보다 ‘전공의 벽’을 낮추려고 했다. 일부 학과 간 대학원 정원도 조정했다. 서울대 출신이 공무원이나 법조인으로 많이 진출했는데 창업을 독려하기 위해 서울대홀딩스도 만들었다. 정부 의존도를 낮추려면 돈을 벌어야 하지 않나. 판소리에 팝을 조화시켜 유명해진 ‘이날치’의 보컬 네 명은 서울대 국악과 출신으로 학교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래서 다른 학생들의 도전도 장려하기 위해 문화예술원을 만들었다.


-미국이나 싱가포르 등 대학 경쟁력에서 앞선 나라들은 학과를 통합하거나 무학과(無學科)로 뽑는 경향이 있는데.


△해외 대학의 변화를 보면 무서울 정도다. 하지만 우리 대학 사회는 굉장히 보수적이다. 총장으로서 대학 시스템을 공급자(교수) 위주에서 복수 전공, 부전공 확대 등 수요자(학생) 위주로 바꾸려고 했다. 복수 전공에 따라붙었던 정원이나 학점 제한 등도 많이 풀었다. 올해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을 공동 수상한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 겸 고등과학원 스칼라·석학교수의 경우 서울대 물리학과 3학년 때 5과목 중 4과목에서 F학점을 받았다. 하지만 수학을 복수 전공해 졸업할 수 있었다. 이렇게 실패를 용인하는 식으로 교육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 서울대도 KAIST나 포스텍처럼 앞으로 1학년은 학과 없이 뽑아서 2학년 때 학과를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서울대 자연대는 1990년대 무학과를 도입했다가 얼마 못 가 이를 폐지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 인기가 떨어지는 학과에서 반발하는 등 적지 않은 진통이 따랐기 때문이다.



오세정(앞줄 왼쪽 세 번째) 서울대 총장이 코로나19 팬데믹이 터지기 전인 2019년 5월 학생·교원·동창 등과 관악캠퍼스 잔디광장에서 ‘Sing! SNU 천인만창’ 행사를 갖고 흥겨워하고 있다.

-서울대가 최근 발간한 ‘2025~2040년 발전 계획’ 보고서를 보면 신입생 통합 선발과 9월 개학 등을 추진하기로 했는데.


△교직원, 학생, 외부 전문가로 꾸린 장기발전계획위원회의 안이다. 2040년까지 신입생을 학과 구분 없이 뽑고 미국처럼 매년 9월에 시작해 이듬해 5월까지 3학기제로 바꾸자는 것이다. 서울대의 교육 품질·연구 성과 저하를 지적하는 내용도 있다. 학과·단과대학 간 장벽 허물기, 도전적 융합 연구 지원, 국제화 강화, 대학 운영 혁신과 재정 확충, 사회 공헌 확대, 베트남 하노이 등 해외 캠퍼스 설립 제안도 담겨 있다.


-취지가 좋지만 학내 반발 등도 따를 듯하다. 후임 총장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장기 발전 계획에 교수들이 동의해야 되지만 이해관계 때문에 추진이 쉽지 않을 수 있다. 앞으로 차기 총장이 확정(내년 2월 1일 취임)되면 협의해 관련 연구 과제를 정하려고 한다. 차기 총장이 전공의 벽을 없애 복수 전공 및 부전공 비율을 현재 30%에서 50%까지 높였으면 한다. 재정 독립도 중요하다.


-국가 R&D도 빼놓을 수 없는 문제다. 과거 한국연구재단 이사장과 기초과학연구원(IBS) 원장을 지냈는데.


△연구 지원 기관은 평가의 공정성을 제일 중요하게 여긴다. 논문 수와 임팩트팩터(피인용 지수) 위주로 본다. 우리는 시장이 좁은 데다 상피제로 인해 평가 풀이 제한적이다. 제대로 된 전문가가 평가에 참여하기가 쉽지 않다. 세계적으로 국가 R&D 규모를 볼 때 4위권으로 우리보다 한 단계 정도 높은 독일의 경우 평가자 중 절반 이상을 외국인으로 활용한다. 연구재단은 워낙 R&D 과제가 많아 그렇게 할 수 없다. 다만 연구재단 이사장 시절 연구자당 7억~10억 원을 지원하는 창의 과제에 대해 영어로 작성한 제안서를 의무화하고 외국인에게 서면 평가서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효과가 제한적이었다. 참고할 수는 있지만 심사는 같이 모여서 해야 한다. 평가하는 데 연구비의 1~2% 정도는 써야 효과적인데 우리는 미국보다 덜 쓴다. 미국은 평가자가 2~3일 같이 모여 토론하고 평가한다. 퍼스트 무버 연구의 경우 가산점을 준다. 반면 우리는 다른 곳에서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다. 패스트 팔로어를 자초하는 것이다.




-IBS는 연구단을 한 번 선정하면 오래 지원하기 때문에 평가에 돈을 꽤 쓰지 않나.


△IBS는 평가자 중 외국인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원장으로 지낼 때 평가에 돈을 많이 배정하기 위해 예산 당국과 티격태격했다. 한 연구단마다 매년 100억 원 이상(지금은 연구단이 33개 정도로 증가해 연 50억~60억 원으로 감소)을 지원하는데 평가에 몇억 원을 쓰는 게 뭐가 문제냐고 항변했다.


-외국인 평가자들은 어땠나.


△IBS가 평가할 때 논문 수와 피인용 지수, 네이처 등의 유명 학술지 게재 여부 등도 보는데 외국인 평가자 중 일부는 이를 거부하기도 했다. 제안서에 담긴 아이디어를 봐야 하는데, 자칫 편견이 생겨 제대로 평가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외국에서 제임스웹 우주 망원경을 활용한 연구 과제를 제출한 연구자들을 블라인드 방식으로 평가했더니 대학원생이 10%가량을 차지했다고 한다.


-올해 60조 원가량의 예산을 쓰는 미국의 국립보건원(NIH)을 비롯해 국립과학재단(NSF), 국방부 고등연구계획국(DARPA) 관계자를 취재해보니 R&D 평가 방식이 우리와는 확연히 다르던데.


△미국에서는 아이디어를 중요하게 평가한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느냐를 본다. 논문 등 기존 업적은 부수적인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논문을 썼느냐에 주안점을 둔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 부담스러운 환경이다. 객관성과 공정성을 너무 강조해 모든 것을 숫자로 따진다. 노벨상도 처음 하는 연구를 시도해야 받을 수 있다. 첫 연구를 응용·개발 연구까지 잘 이어지게 하면 파급력이 큰 기술 사업화도 할 수 있다. 미국과 달리 우리 공공 기관장이 자주 바뀌어 일관성이 부족하고 단기적인 사업에 그치는 일도 개선해야 한다. 과거에는 선진국만 벤치마킹하면 돼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이제는 우리 고유의 색깔을 내야 한다. 과학기술계나 산업계나 남 따라하기 패러다임에서 확실히 벗어나야 한다.





-4년 전 총장 선거에 도전하기 전 국회의원으로 2년 반가량 활동했는데.


△국회 시스템이 전문성이나 비전을 요구하는 게 아니었다. 지엽적인 토픽을 터뜨려야 뜨더라. 언론도 어젠다 세팅이 중요한데 1년 정도 지나면 아무도 기억 못할 것을 키운다. 국정감사를 평가할 때도 언론에 몇 번 나왔느냐를 보니 의원들이 언론에 관심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러니 여야가 말꼬리 잡고 시끄럽게 싸우는 게 관행이다. 한 번은 실험하다가 화상을 입은 대학원생에게 상해보험 외에 산재보험도 적용하기 위한 법안을 발의했다. 그런데 고용노동위원회에서 나를 부르지도 않고 논의도 안 했다. 여야 의견이 다른 법안은 더 지지부진하더라. 정치적 힘이 있어야 한다고 느꼈지만 초선은 한계가 있다. 당시 장관 출신의 한 비례대표 초선 의원은 ‘어떤 이슈가 나오면 우선 내 재선에 도움이 되고 당이 집권하는 데 유리한지 여부가 판단 기준’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정치권이 당파성에 집착하지 말고 무엇이 국익에 중요한지를 먼저 판단해야 한다.



◆He is…1953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고 수석 졸업과 서울대 수석 입학 및 수석 졸업(물리학과)의 기록을 세웠다. 미국 스탠퍼드대 물리학과 석·박사를 취득한 뒤 제록스 연구원을 지내다 1984년 서울대 교수로 임용됐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자문위원, 과학기술부 복합다체계물성연구센터 소장, 서울대 자연과학대학장을 거쳐 한국연구재단 이사장과 기초과학연구원 초대 원장을 역임했다. 2016년 4월부터 국민의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의원직을 사퇴한 뒤 2019년 2월 서울대 총장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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