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본 선임기자의 관점] 남명의 '起업가정신' 쇼인과 달랐다

[뷰 앤 인사이트]
기존 체제 분노한 韓日사상가로
'실천' 원류는 같지만 지향점 달라

고광본 선임기자


‘남명 조식 선생과 일본의 요시다 쇼인.’


두 사람은 혁신 사상가이자 교육가로 한일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행동하고 일갈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제자들을 대거 양성해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일 양국에서 도전하고 모험해 세상을 혁신하는 기업가정신(起業家精神)의 원류라고 볼 수 있다.


두 사람을 굳이 비교한 것은 1~2일 경남 진주·산청·의령 등 남명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쇼인’도 같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서울경제가 이곳에서 연 ‘2022 과학기술 K-기업가정신 캠프’의 화두 중 하나도 ‘남명과 기업가정신’이었다. 남명 선생이 열두 번이나 올랐던 지리산을 바라보며 후학을 양성하던 산천재(山天齋)에서 ‘오늘날이라면 선생이 어떤 시대정신을 보여줄까’ 궁금했다.


남명은 탁상공론을 경계하고 지행합일, 즉 실천을 중시했다. 실학 정신과도 맞닿은 대목이다. 그는 1555년 명종과 수렴청정 중이던 문정왕후를 각각 고아와 과부라고 칭하며 “온 나라의 형세가 안으로 곪을 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앞서 네 차례나 사화(士禍)가 있었는데도 목숨을 걸었다. 두 사람은 “임금에게 욕을 하느냐”며 분노했으나 500여 명이 연서한 동조 상소가 이어지고 민심도 남명 편이어서 어쩌지 못했다.


남명은 김해 산해정(山海亭)에 이어 회갑이 되던 1561년에는 산청에 산천재를 짓고 제자 양성에 박차를 가했다. 제자들에게 왜구의 침범에 대한 대책을 묻고 병법과 천문·지리 등을 가르쳤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경상우도(서울 기준으로 경상도 오른쪽)에서 정인홍·곽재우 등 그의 제자 50명 이상이 각각 의병장이 돼 풍전등화 같던 나라를 구한 것도 이 덕분이다. 이 지역에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의병 등 독립운동가가 많이 나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흐름에서 사농공상 신분 구조의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양반가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역발상이 나름 용인됐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이병철(삼성)·구인회(LG)·허만정(GS) 등 1세대 기업인들이 무더기로 배출됐다.


남명의 산천재를 보노라니 쇼인이 1856년부터 3년여 제자를 길렀던 ‘쇼카손주쿠’라는 야마구치현(조슈번)의 조그만 학당이 떠올랐다. 일본 근대화의 산실로 여겨지는 곳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참혹한 일제강점기와 그로 인한 한국전쟁의 고통까지 이어지게 만든 발원지이다.


사무라이 출신으로 막부 타도를 외치다 29세의 나이로 불꽃 같은 생을 마감한 쇼인은 화혼양재(和魂洋才·일본 정신과 서양 지식)를 강조하며 유학·군사·산업·세계정세를 교육했다. 정한론(征韓論) 등 아시아 침략의 필요성도 강조한다. 제자 그룹 중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아시아 침략의 원흉들이 대거 나온 게 이 때문이다. 최근 비명횡사한 아베 신조 전 총리도 늘 그를 우상으로 삼았다.


‘쇼인’이 세계 평화보다 국수주의로 치달은 게 화근이었다. 일본에서는 영웅이 됐지만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기업가정신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준다.


지금은 미중 패권 전쟁, 우크라이나 전쟁, 글로벌 밸류체인 붕괴, 경기 침체 장기화 우려 속에 남명처럼 기업가정신을 갖고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나라의 구조를 혁신해야 할 때다. 과학기술·경제 전쟁 시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주요 5개국(G5) 도약의 꿈도 물거품이 될 것이다.


우리는 가혹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보릿고개를 넘어 산업화·민주화·정보화를 달성하고 4차 산업혁명에서 입지를 다지고 있다. 한류 현상이라는 저력도 있다. 하지만 정치적 리더십이 부재하고 사회적 혁신도 지지부진하다. “부국강병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국가적 역량을 모으시오. 단 우리만 생각해서는 안 되오.” 남명 선생이 경의(敬義·나를 성찰하고 의를 실천함) 사상에 비춰 이렇게 말씀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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