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을 축소해놓은 것처럼 저 연령대에 하기 힘든 기술을 갖고 있어요. 전국 랭킹 1위라고 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15년 전인 2007년 TV로 방영된 ‘날아라 슛돌이 3기’에서 고(故) 유상철 전 인천 감독은 ‘여섯 살’ 이강인(21·마요르카)을 이같이 평가했다.
국내에서는 경쟁 상대를 찾을 수 없었던 이강인은 더 넓은 세상을 원했다. 2011년 열 살의 나이로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그는 스페인 명문 발렌시아와 계약을 맺고 빅리거의 꿈을 키웠다. 발렌시아 유스 팀에서의 이강인은 물 만난 물고기와 같았다. 나날이 성장하던 그에게 스페인 현지에서는 ‘발렌시아의 진주’라는 애칭을 붙였다. 발렌시아의 미래를 책임질 차세대 에이스라는 뜻이었다. 최초라는 수식어도 늘 따라다녔다. 2018년 1군 데뷔에 성공한 이강인은 발렌시아 최초의 동양인 선수, 발렌시아 최연소 데뷔 외국인 선수, 한국 역대 최연소 유럽 1군 무대 데뷔 선수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2019년 1월에는 1군 계약을 맺었는데 8000만 유로(약 1113억 원)라는 거액의 바이아웃 금액이 책정돼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정작 성인 무대에서의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팀을 이끌었던 마르셀리노 가르시아 토랄 감독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이강인을 외면했다. 한창 성장해야 할 시기에 경기에 나서지 못하니 고민만 쌓여갔다. 힘든 시기 속 한줄기 빛은 2019년 열린 20세 이하(U-20) 월드컵이었다. 대회 전 당차게 우승을 외쳤던 ‘막내형’ 이강인은 동료들보다 한두 살이 어린 나이에도 2골 4도움의 활약으로 팀을 결승으로 이끌었다. 비록 목표했던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그는 한국의 U-20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골든볼(MVP) 수상자로 이름을 올렸다.
U-20 월드컵에서의 활약에 힘입어 A대표팀 데뷔의 꿈도 이뤘다. 그런데도 발렌시아 내에서의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고 반복된 감독 교체 속에서 이강인의 입지는 더욱 흔들렸다. 출전 기회가 줄어드니 파울루 벤투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도 더 이상 그를 찾지 않았다. 지난해 3월 일본과의 평가전(0 대 3 패)이 마지막이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결국 그는 지난해 여름 발렌시아와의 11년 인연을 정리하고 마요르카로 이적해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마요르카에서의 첫 시즌에는 기대만큼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2022 카타르 월드컵과는 멀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올 시즌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 돌아왔다.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2라운드 레알 베티스전에서 첫 도움을 올린 뒤 리그 4경기 연속 공격 포인트를 올렸다.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도 정확한 프리킥으로 도움을 기록했다. 게다가 약점으로 지적받던 스피드와 수비 가담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유럽 무대에서 뛰는 한국 선수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A대표팀 재발탁 논의도 일었다.
고집스럽기로 유명한 벤투 감독도 이번에는 이강인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달 12일 진행된 9월 A매치 명단 발표 기자회견에서 1년 6개월 만에 이강인을 호출한 벤투 감독은 “최근 경기력과 우리 팀의 요구 사항을 잘 수행할 수 있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고 선발 이유를 밝히며 “대표팀에서의 활용법을 고민 중”이라고 덧붙였다. 이달 23일과 27일 예정된 코스타리카, 카메룬과의 두 차례 평가전이 카타르 월드컵 본선 엔트리를 확정하기 전 마지막 기회이다 보니 이강인의 발끝에 팬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두 경기에서 벤투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카타르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