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안보와 과학기술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 기술 패권 시대에 반도체 같은 초격차 기술을 10여 개 확보한다면 한반도의 전쟁 우려를 억제할 뿐 아니라 미래 성장 동력을 확충할 수 있습니다.”
염재호 SK 이사회 의장 겸 태재대설립위원장은 15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서울경제 미래컨퍼런스 2022’에서 주제 발표를 통해 “우리 모두 투키디데스 함정(기존 패권국과 신흥 강대국이 부딪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세계 전략과 인재 전략을 짜 힘 있게 추진해야 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진 가운데 미중 갈등이 최악으로 치달을 경우 화약고는 한반도나 남중국해가 될 것이라는 게 그의 우려다. 따라서 반도체, 바이오, 인공지능(AI), 양자 기술 등 국가전략기술을 육성하고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와 같은 글로벌 기업을 많이 만들어야 한반도 내 전쟁 억지력이 커진다는 것이다.
고려대 총장 출신인 염 의장은 이날 국가 연구개발(R&D)의 핵심 축 중 하나인 대학에서 영향력이 큰 과학기술을 연구하고 기업과의 산학 협력을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아파트와 상가·유흥주점이 즐비한 대학가에 판교 테크노밸리와 같은 ‘R&D 베이스캠프’를 구축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현재는 대학에서 논문 위주의 문화가 뿌리 깊어 영향력이 큰 과학기술을 개발하거나 기업의 혁신 역량을 높이는 데 집중하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교수에 대한 대우나 인센티브가 크게 부족하다”며 “25년 전 IMF 외환위기 사태 이후 초래된 이공계 기피 현상이 심화돼 큰 문제”라고 토로했다. 그는 해결책으로 연구비 집행 방식을 바꿔 교수의 연구 의욕을 고취하고 기업 출신 인사의 교수 겸직을 확대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이공계 학부와 대학원 활성화를 위해서는 정부가 연 1000억 원만 더 투자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의대로의 인재 쏠림 현상이 지속되는 것에 대해서는 임상과 의료 연구를 같이 활성화할 수 있게 하고 이공계·인문사회계와의 협력을 유도해야 한다고 했다.
염 의장은 “해외로 나간 국내 인재뿐 아니라 글로벌 인재들을 산학연에 유치할 수 있는 국가적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며 “산학연이 글로벌 인재와 어우러지는 ‘A*STAR’와 같은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염 의장은 암기 위주인 대학의 교육 방식에 대해서도 “산업화 시대에 통하던 방식으로 수명을 다했다”고 일침을 가했다. 그는 “대학이 문제 해결 능력을 길러주는 쪽으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말했다. 응용의 발판이 되는 ‘기초과학 역량’과 협업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능력’, 나아가 ‘기업과 사회문제 해결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염 의장은 주제 발표에 이어 진행된 고광본 서울경제 선임기자와의 대담에서 대한민국이 퍼스트무버(선도자)로 나아가기 위한 패러다임 대전환과 국가 리더십 구축을 강조했다. 특히 글로벌 밸류체인 붕괴에 대비해 전략기술과 소재·부품·장비, 핵심 원료 수급 문제 등 과학기술을 비롯해 경제·외교·안보·교육·산업·문화까지 포괄해 국가의 생존과 성장 동력을 확충할 수 있는 데이터 컨트롤타워를 구축해야 한다는 지론을 폈다. 대통령실과 여야정, 산학연을 아울러 국가적으로 유기적 협력 생태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국가적으로 급격한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고 선도해나가야 하는데 심하게 얘기하면 구한말 변화를 거부하는 세태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꼬집었다. 미국·중국·유럽 등이 국가의 생존과 미래를 위해 역량을 모으고 있는데 우리는 변화에 둔감하다는 것이다.
그는 “대학은 인재 양성뿐 아니라 국가전략기술과 미래 성장 동력 창출의 임무도 갖고 있다”며 “미국의 실리콘밸리와 보스턴밸리, 리서치트라이앵글파크, 스웨덴 스톡홀름의 시스타 사이언스파크, 프랑스 니스 사이언스파크처럼 국내 대학이 교내와 주변에 기업과 함께 정보기술(IT), 바이오 밸리 등의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이와 관련해 고 선임기자는 “국가전략기술 중 우리가 중국보다 앞서는 것은 반도체와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등 일부에 불과하고 AI, 빅데이터, 모빌리티, 양자 기술, 로봇, 우주항공 등은 뒤쫓아가는 형국”이라며 “국가적으로 도전하고 모험하는 기업가정신을 고취하고 인재가 맘껏 뛰놀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염 의장은 교육 혁신과 관련해 조창걸 전 한샘 명예회장, 김도연 전 포스텍 총장 등과 함께 내년 3월 개교하는 태재대를 통해 국내 대학의 메기 역할을 하겠다는 뜻도 분명히 했다. 그는 “태재대는 국내와 외국인 교수 반반, 온·오프라인 교육, 국내와 해외 현장 교육, 한국인과 외국인 각 100명 정원 등 혁신적 접근을 통해 글로벌 인재를 양성할 것”이라며 “그런데 아직 정부 차원에서 기준이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