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우유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해 대안으로 제시한 ‘원유(原乳·우유 원료) 용도별차등가격제’의 도입이 확정됐지만 당분간 우유 가격이 꺾이기는 힘들 것이라는 게 업계의 관측이다. 낙농가와 우유 업체 간 세부 협의 사항이 남아 있어 차등가격제가 내년부터 적용되는 데다 올해까지는 기존 원유 가격 산정 체계인 ‘생산비연동제’를 그대로 적용, 사료 가격 상승 등을 반영해 원유 가격이 결정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유 가격은 물론 우유를 재료로 하는 빵·커피·아이스크림이 동반 상승하는 ‘밀크플레이션(우유+인플레이션)’이 현실화돼 인플레이션 국면에서 소비자들의 부담이 더욱 가중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원유 가격 체계 10년 만에 개편했지만 효과는?=용도별차등가격제는 유업체가 낙농가로부터 원유를 사들일 때 음용유(마시는 우유)와 가공유(치즈·버터 등 유제품용)의 가격을 달리 매기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전까지는 2013년에 도입된 생산비연동제를 따랐다. 생산비 증감에 연동해 원유 가격을 조정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우유 수요가 주는데도 생산비가 는다는 이유로 원유 가격이 지속적으로 상승하자 정부는 가격 안정을 위해 지난해 8월부터 용도별차등가격제 도입을 전격 추진했다. 소득 감소를 우려한 낙농가들의 극렬한 반발에 부딪혔지만 수십 차례 간담회를 통해 정부가 설득에 나섰고 낙농계가 마침내 이를 받아들였다.
이제 관심은 올해 원유 가격으로 쏠리고 있다. 낙농가가 용도별차등가격제 도입에 찬성했지만 사료비 급등을 반영해 올해는 원유 가격을 인상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낙농진흥회는 원유 가격 결정을 위한 소위원회를 구성해 이르면 다음 달 중순까지 올해 원유 가격 인상 폭을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통계청이 올 5월 발표한 지난해 우유 생산비 증가분에 따라 올해 원유 가격 인상 폭은 ℓ당 47∼58원 사이에서 결정된다. 이는 원유 생산비연동제가 시행된 2013년 이후 최대 인상 폭이다.
◇유가공·낙농가 웃고 소비자 울고=이번 원유 가격 체계 개편에 따른 부담은 고스란히 소비자들에게 돌아올 것으로 전망된다. 원유 가격이 2013년 이후 최대 폭으로 오르면 흰 우유뿐 아니라 커피와 아이스크림·빵 등 유가공품 가격도 전방위적으로 인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낙농가는 일단 원유 가격을 올릴 수 있게 됐고 유업계는 차등가격제 도입으로 가공유를 기존보다 싼 가격에 매입할 수 있게 돼 조금이라도 이득을 본 셈”이라며 “소비자들만 비싼 가격에 우유를 구매하게 돼 손해를 보게 됐다”고 말했다.
실제로 흰 우유 가격 인상이 예상된다. 업계에서는 이르면 다음 달부터 흰 우유 1ℓ짜리 가격이 3000원까지 오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현재 서울우유 ‘나100%(1ℓ)’ 제품의 가격은 2700원이다. 앞서 서울우유는 지난해 원유 가격이 ℓ당 21원 올랐을 때 흰 우유 가격을 200원 인상한 바 있다. 올해 원유 가격의 예상 인상 폭이 ℓ당 47~58원인 것을 감안하면 흰 우유 가격은 300원 이상 오를 것이라는 게 업계의 관측이다. 업계 1위 서울우유가 가격을 인상하면 매일유업과 남양유업·빙그레 등 후발 주자들도 도미노 인상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흰 우유가 오르면 유가공품 가격도 비싸진다. 대표 품목은 카페라테 등 커피와 아이스크림·생크림이다. 앞서 스타벅스·커피빈·엔제리너스 등 커피 전문점은 올 초 가격 인상을 단행했는데 흰 우유 가격이 뛰면 추가 인상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한 커피 전문점 관계자는 “라테 한 잔의 순수 재료비 1500원 중 우유만 500원”이라며 “셰이크와 빙수 등에 들어가는 것까지 감안하면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생크림이 들어가는 빵과 아이스크림 가격도 비상이다. 빵 프랜차이즈 파리바게뜨와 뚜레쥬르는 각각 올 2월과 7월에 빵과 케이크류 가격을 6~11%가량 올린 바 있다. 제빵 업계의 한 관계자는 “재료를 공동으로 구매하지 않는 영세 빵집부터 줄줄이 가격을 올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밖에 올해 한 차례 아이스크림 가격을 올린 롯데제과와 빙그레도 추가적인 인상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가격 또 올라? 수입 멸균우유 찾는다=정부는 낙농제도 개편으로 우유 가격을 잡겠다는 목표지만 소비자들의 반응은 냉담하다. 정부 측은 “올해 우유 가격 인상은 불가피하지만 차등가격제가 도입되면 장기적으로는 가격 안정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입장이지만 이미 한국의 우유 가격이 전 세계 상위 10위 안에 들 만큼 비싼 상황에서 올해 추가적인 인상까지 더해지면서 가격 저항이 심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반면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수입 멸균우유 소비량은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GS더프레시에 따르면 지난달 멸균우유 매출은 전년 동월 대비 10% 이상 증가했다. 같은 기간 전체 우유 매출 신장률이 3%대인 것을 감안하면 성장세가 가파르다. 값이 싼 데다 멸균우유는 일반 우유와 영양분은 동일하면서도 최대 6개월까지 보관이 가능해 소비자들이 많이 찾고 있다. 관세청에 따르면 올 상반기 멸균우유 수입량은 1만 4640톤으로 전년 동기 대비 57% 증가했다. 우유 업체들로 구성된 유가공협회 관계자는 “국산 우유 자급률이 이미 50% 선 아래로 떨어진 만큼 가격 인상 폭을 최소화하기 위해 협상에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