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국 산업 보호에 전방위적으로 규제를 설치하는 미국이 이번에는 외국 회사의 자국 기업 인수 문턱을 높였다. 사실상 중국을 겨냥한 조치이지만 대규모 실탄으로 인수합병(M&A) 기회를 노리는 한국 기업에도 덩달아 악재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15일(현지 시간) 외국인 투자를 국가 안보 차원에서 철저히 감독하도록 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CFIUS)가 외국인 투자가 국가 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할 때 핵심 공급망, 첨단기술, 투자 동향, 사이버보안, 미국인의 개인정보 보호 등 다섯 가지 요인을 고려하라는 지침을 담은 게 핵심이다. 백악관은 “국가 안보 환경이 진화함에 따라 CFIUS의 심사 절차도 진화해야 한다”며 행정명령 발동의 배경을 설명했다. CFIUS에 행정명령이 내려진 것은 1975년 설립 이후 처음이다.
재계에서는 조 바이든 정부의 이번 행정명령이 실질적으로 중국을 겨냥한 조치라고 해석했다. 실제로 CFIUS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때도 중국의 미국 기업 인수를 여러 건 좌초시킨 바 있다. CFIUS는 M&A 등 외국 회사의 대미 투자가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할 경우 거래를 아예 막거나 조건부로 승인할 수 있다.
다만 행정명령이 명목상 중국이 아닌 모든 나라의 거래를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은 우리 기업에도 부담이라는 분석이다. CFIUS가 세계무역기구(WTO) 규정 위반 논란 등을 의식해 한국 기업의 대미 투자 시에도 한층 깐깐한 기준을 들이댈 수 있다. 생산·매출 측면에서 중국 의존도가 높은 기업일수록 견제 수위는 더 높아질 수 있다. 이번 행정명령에도 외국인과 ‘제3자와의 관계’도 고려하라는 내용이 포함됐다.
현대차(005380)는 로봇 전문 업체 보스턴다이내믹스를 인수하고 양자컴퓨터 스타트업 아이온큐(IonQ)에 투자할 때 CFIUS 승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SK하이닉스(000660)는 인텔의 낸드 사업부를 인수할 때 CFIUS에서 승인을 받았다. CFIUS가 발간한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총 184건의 핵심 기술 거래 심사 건수 중 한국은 13건을 차지해 독일(16건), 영국(16건), 일본(15건)에 이은 4위를 기록했다.
더욱이 전략산업 공급망을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라는 압박에 한국 기업이 최근 준비하는 대미 투자 규모는 급격히 커지는 상황이다. 삼성전자(005930)는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 복귀를 기점으로 시스템반도체 등 대형 M&A 기회를 적극 모색하고 있다. 최태원 SK(034730)그룹 회장은 7월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현지에서 화상 면담을 하면서 220억 달러 규모의 신규 투자를 약속했고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5월 바이든 대통령과 한국에서 직접 만나 105억 달러 규모의 투자안을 제시했다.
LG(003550)그룹에도 북미 지역은 배터리 생산의 최대 거점이다. 롯데그룹 역시 신동빈 회장의 주도 아래 바이오 등 신사업 분야에서 미국과 협력 강화, M&A 추진 등을 시도하고 있다. 미국이 보호하겠다고 나선 초소형 전자공학(ME), 인공지능(AI), 생명공학, 바이오제조, 양자컴퓨팅, 첨단 청정에너지, 기후변화 기술 등은 하나같이 한국 기업들이 눈독을 들이는 최첨단 분야다. CFIUS는 영국·호주·캐나다·뉴질랜드 등 군사동맹인 ‘파이브아이스’ 소속만 예외 국가로 분류해 일부 규정에 면제 혜택을 주고 있으나 한국은 여기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5대 그룹의 한 관계자는 “소프트웨어 등 미국이 확실히 강세를 보이는 분야는 M&A 등 현지 투자 없이 우리가 자립하기 힘들다”며 “한국 대기업 가운데 중국과 사업적으로 연관되지 않은 회사가 없는 만큼 미국이 구체적인 내용을 밝힐 때까지 계속 주시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