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005930) 부회장이 21일 유럽·중남미 출장 귀국 길에서 영국의 반도체 설계 업체(팹리스)인 ARM 인수합병(M&A)과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방한 계획을 명확히 거론한 사실을 재계가 상당히 이례적인 일로 평가했다.
대형 인수합병(M&A) 작업의 경우 상대와의 접촉 여부를 외부에 알리지 않는 게 통상적인 관례임에도 이 부회장은 오히려 자신의 담판 의지를 부각하는 쪽을 택했기 때문이다. 이에 업계 안팎에서는 이 부회장이 2주간의 출장 동안 굵직한 M&A 성과에 한층 가까이 다가간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ARM은 현실적으로 삼성전자의 약점을 채울 최대 M&A 후보군으로 꼽힌다. 반도체가 필요한 거의 모든 분야에 설계 자산(IP)을 제공하는 회사인 까닭이다.
ARM의 대주주는 손 회장의 일본 소프트뱅크그룹이다. 손 회장은 2020년 이 회사를 미국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에 매각하려다가 미국·영국·유럽 경쟁 당국의 반독점 심사 문턱을 넘지 못하고 실패했다. 당시 인수 금액은 반도체 업계 M&A 사상 최대 규모인 660억 달러였다.
각국의 견제가 심하다 보니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ARM 인수전에 나서더라도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들과 컨소시엄 형식을 택할 공산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현지 언론들은 올 5월 30일 이 부회장이 서울에서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와 만났을 때도 ARM 공동 투자를 논의했을 수 있다고 추정했다. 시장에서는 이미 ARM 인수전 참여 의사를 내비친 SK하이닉스(000660), 미국 퀄컴도 삼성전자와 맞손을 잡을 수 있는 파트너로 보고 있다.
업계에서는 나아가 이 부회장이 이날 “ARM 경영진과는 만나지 않았다”고 발언을 한 데 대해서도 여러 해석을 내놓았다. 일각에서는 이 부회장이 역설적으로 이번 출장에서 ARM이 아닌 다른 주요 기업 CEO들과는 두루 만났음을 시사한 게 아니냐는 분석도 제기했다. 재계에서는 ARM뿐 아니라 미국계 인공지능(AI) 기업들, 독일의 시스템반도체 기업 ‘인피니언’, 네덜란드의 ‘NXP’ 등도 삼성전자의 M&A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
업계에서는 애초부터 이 부회장이 출장 기간 해외 곳곳에서 미래 먹거리 확보를 위한 협력 기회를 타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봤다. 매주 이어지는 삼성물산(028260)·제일모직 부당합병 혐의 재판 일정상 그가 여전히 해외를 쉽게 드나들 수 없는 입장인 탓이다. 이 부회장 입장에서도 광복절 복권 이후 국민이 납득할 만한 글로벌 경영 성과를 빠른 시일 내에 제시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
이 부회장은 16일(현지 시간)부터 영국에 머물면서도 고(故)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장례식에는 직접 참석하지 않았다. 여왕 서거라는 특수한 시점은 적극적인 사업 논의에 제약이기도 했지만 각국 고위층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 부회장은 이를 두고 “특사로 런던에 가려고 했는데 여왕께서 돌아가셔서 일정이 조금 바뀌었다”고만 설명했다.
이 부회장은 연내 회장 취임 계획을 묻는 질문에는 “회사가 잘되는 게 더 중요한 것 같다”며 즉답을 피했다. 이 부회장은 복권 이후 국내외 사업장을 잇따라 방문하면서 그룹 총수로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에 대해 재계에서는 이 부회장이 이르면 다음 달 고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에 준하는 강도 높은 혁신안과 함께 회장에 취임할 수도 있다고 전망한다. 이번 출장 기간에도 이 부회장은 멕시코에서 삼성전자 케레타로 가전 공장과 삼성엔지니어링 도스보카스 정유공장 건설 현장을 각각 방문해 임직원들을 격려했다. 파나마에서는 중남미 지역 법인장 회의를 열고 현지 사업을 점검했다. 현 5대 그룹 총수 가운데 회장이 아닌 인물은 이 부회장이 유일하다.
이 부회장은 “이번 출장은 오지에서 회사를 위해, 우리나라를 위해 열심히 근무하고 있는 임직원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 주목적”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 부회장의 이번 14일간의 출장은 2018년 10월 이후 가장 긴 해외 공식 일정이 됐다. 삼성전자의 대형 M&A는 2017년 초 미국 전장 기업 하만 인수가 마지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