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BIFF] '고속도로 가족' 라미란·정일우 재발견, 잔잔하고 뜨겁게 울린다

[리뷰] 영화 '고속도로 가족'
부산국제영화제 최초 공개
파노라마 섹션 공식 초청작
고속도로 휴게소 노숙 가족 이야기
라미란·정일우·김슬기·백현진 연기 변신


코로나19로 주춤했던 부산국제영화제(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BIFF)가 3년 만에 이전의 모습을 찾았다. 개·폐막식을 비롯한 이벤트, 파티 등은 성대해지고, 관객과 영화인이 함께 호흡하는 대면 행사가 늘었다. 사회적 거리두기 없이 정상적으로 진행되는 축제에 영화인들과 관객들의 설렘이 가득하다. BIFF가 다시, 영화의 바다가 됐다.



영화 '고속도로 가족' 스틸 / 사진=CJ CGV

때로는 거창한 방법보다 땅과 맞닿아 있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더 와닿는다. 세상을 살며 그냥 지나치던 것들을 자세히 바라보고, 생각을 전환하게 된다. 보는 내내 가슴을 울리고 스크린에 불이 꺼진 이후에도 여운이 남는 영화가 그렇다.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인 ‘고속도로 가족’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8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롯데시네마 센텀시티에서 ‘고속도로 가족’ 시사 및 GV(관객과의 대화)가 진행됐다. 이상문 감독과 배우 정일우 김슬기 백현진 서이수 박다온이 참석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고속도로 가족’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캠핑하듯 노숙하는 기우(정일우), 지숙(김슬기) 부부 가족의 이야기다. 이들은 지갑을 잃어버려 고속도로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는 거짓말로 휴게소 방문객들에게 돈을 빌린다. 그러던 어느 날, 휴게소에서 선심을 썼던 영선(라미란)은 다른 휴게소에서 같은 방식으로 돈을 빌리고 있는 기우 가족을 보고 경찰에 신고한다. 이후 영선과 기우 가족의 엮이며 새로운 인연을 맺는다.


작품은 오는 11월 개봉을 앞두고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았다. 한 차례 GV를 진행한 이후 관객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이날 관객석도 꽉 찼다. “이번 영화제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본 영화다” “두 번째 보러 왔다”는 관객들의 호평이 이어지기도 했다.



8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롯데시네마 센텀시티에서 열린 영화 '고속도로 가족' GV에 이상문 감독과 배우 정일우 김슬기 백현진 서이수 박다온이 참석했다. / 사진=추승현 기자

관객들의 마음을 뜨겁게 만든 ‘고속도로 가족’의 관전 포인트는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는 모습이다. 작품의 인물들은 모두 가슴속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기우는 사회에서 쓰디쓴 실패의 맛을 보고 더이상 사람을 믿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기우의 전부다. 영선은 큰 사고로 자식을 잃은 아픔이 있다. 남편(백현진)과의 관계는 무미건조해지고 공허한 삶의 반복이다.


어떤 것으로도 메워지지 않던 구멍 난 마음은 서로를 통해 채워진다. 영선이 먼저 오갈 곳 없는 고속도로 가족에게 손을 내밀면서 인연이 시작된다. 자신이 운영하는 중고가구점의 방 한 칸을 내어주고, 오랜 노숙 생활로 학교를 다녀본 적 없는 기우의 딸 은이(서이수)에게 한글도 가르쳐준다. 본인이 임신 몇 개월째인지도 모르는 지숙을 병원에 데려가기도 하며 사회와 소통하는 방법을 차근차근 알려준다. 영선은 그렇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으로 고속도로 가족을 지켜내며 미소를 되찾는다.





어딘가 있을 법한 일인 것 같아 더 아프게 다가온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 ‘어른들은 몰라요’ 등 현실과 맞닿아 있는 작품의 조감독을 거쳐온 이상문 감독의 손길 덕분이다. 그는 “시나리오 자체가 내가 살면서 걱정과 두려움을 안고 시작된 것이다. 각자의 사정을 안고 살아가고 있지 않나”라며 “다 치유가 된 것은 아니고 계속 그렇게 살고 있다. 관객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배경 또한 디테일하고 현실적이다. 기우가 고속도로에서 방문객에게 돈을 빌리거나, 영선이 중고가구점을 운영하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이 감독은 “서울역이나 부산역, 강남역 같은 곳에서 돈을 빌려달라는 사람들을 굉장히 많이 만났다. 그럴 때마다 ‘저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나와 다르지 않은 사람인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장모님이 실제로 중고가구점을 운영한다. 가끔 일을 도울 때 가구를 가져오고 받는 것을 봤다”며 “공들여 본 건 ‘나도 이렇게 다시 쓰임새가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봤기 때문”이라고 남다른 시선을 이야기했다.




배우들의 호연은 마음을 울린다. 백현진은 “연기를 보는 재미가 있었다. 이 감독이 한명 한명의 인물에게 정말 애정이 많은 사람이고, 자기가 목표하는 어떤 것 때문에 함부로 다루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고 감탄했다.


대중에게 흔히 알려진 이미지를 타파하는 배우들의 포진이라 더 눈길이 간다. 특히 코미디 연기의 대가, 라미란의 새로운 얼굴이 담겼다. 잔잔함 속의 섬세함이 보인다. 얼굴에 드러내지 않지만 가슴속 깊이 억누르고 있는 슬픔이 있다. 악역 대표 배우로 떠오른 백현진은 생활 연기를 탁월하게 선보이며 극의 완성도를 높였다.


정일우는 배우 인생에 길이 남을 연기 변신을 꾀했다. 방랑가부터 삶의 끈을 놓아버린 광기 어린 모습까지 과감하게 연기했다. ‘거침없이 하이킥’ 속 꽃미남 이미지는 온데간데없다. 정일우는 “감정적으로 힘들거나 후유증은 당연히 있었다”며 “촬영 전부터 감독님과 이야기를 많이 나눴고, 촬영할 때는 기우가 돼서 연기했다. 매일 고통스럽긴 했지만 그게 기우라고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김슬기는 내공을 발휘했다. 주로 유쾌하고 센 이미지의 역할을 맡았던 것과 상반된다. 김슬기 또한 “처음에 대본 받고 정말 나한테 들어온 게 맞냐고 되물었다”고 할 정도. 이 감독은 “김슬기를 코미디 배우로 많이 알고 있지만, 코미디 배우를 볼 때 페이소스로 아픔이 많다는 걸 느낀다. 송강호처럼 아픔을 코미디로 승화를 잘 시키는 배우가 있지 않나”라며 “김슬기에게도 그런 걸 느꼈다”고 밝혔다.


오디션을 통해 캐스팅됐다는 아역 배우 서이수, 박다온은 생기를 불어넣었다. 서이수는 어른들의 아픔의 무게를 짊어지고 애어른이 된 은이의 얼굴을 그려냈다. 박다온은 자칫 어둡기만 할 수 있는 작품에 색채를 입혔다.



5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 전당에서 열린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식 레드카펫 행사에 영화 '고속도로 가족' 팀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부산=연합뉴스

작품이 엔딩까지 달려가는 길은 가슴이 아릴 정도로 충격적이다. 이 감독은 “영화를 만들면서 제일 많이 질문을 들었던 건 엔딩이었다.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연출을 하면서 엔딩을 두 가지 생각했다. 하나는 행복한 순간은 과거의 슬픈 시간이 있어서 가능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누군가의 소망이고 어느 한 사람의 선한 의지가 상황을 나아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이라며 “관객들이 함께 생각해 봤으면 한다는 마음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개봉 버전은 2분 정도 다르다”고 귀띔해 기대감을 높였다. 오는 11월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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