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반도체 화학 소재 기업 JSR이 한국 생산·연구개발(R&D) 현지화를 위한 시동을 걸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국내 소재 반도체 대기업을 측면 지원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한 모습이다. 일본은 미국의 중국 ‘반도체 굴기’ 견제 등 치열한 글로벌 반도체 패권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한국·대만 등 우방 국가들과 적극 협력하고 있다.
17일 JSR은 한국에 있는 자회사 ‘JSR일렉트로닉머트리얼즈코리아(JEMK)’ 지분을 전량 인수한다고 밝혔다. JEMK는 JSR이 2014년 국내 소재 유통 회사인 페리(PERI)코퍼레이션과 합작해 만든 회사다. JSR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한국 반도체 고객사에 반도체 소재를 수월하게 공급하기 위해 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페리는 전체 지분의 60%, JSR은 40%를 투자해 JEMK를 세웠다. JSR은 이번 인수로 8년 만에 페리 지분을 전량 획득했다. 이번 JSR의 인수는 회사의 반도체 주요 소재 생산·연구 현지화를 본격화하기 위한 사전 준비 작업으로 간주된다. JSR은 최첨단 반도체 공정인 극자외선(EUV) 노광의 핵심 소재 포토레지스트를 생산하는 회사다. 특히 삼성전자 칩 위탁생산(파운드리)사업부가 JSR의 EUV 소재를 활용하고 있다. 생산 시설과 R&D 설비가 한국에 갖춰진다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생산 라인 운영과 첨단 제품 개발에서 우위에 설 수 있게 된다. JSR 관계자는 이번 인수에 대해 “회사는 반도체 소재 사업에서 국제적 협력을 강화할 것이고 각종 제품을 빠르고 원활하게 공급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업계에 따르면 JSR은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가 활용하는 극자외선(EUV) 포토레지스트 총량의 60~70%를 공급한다. EUV 포토레지스트는 7㎚(나노미터·10억분의 1m) 이하 최첨단 반도체 ‘노광’ 공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핵심 소재다. 노광 공정은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 웨이퍼 위에 빛으로 회로 모양을 찍어내는 핵심 작업이다. 이 작업을 하려면 웨이퍼 위에 빛과 반응하는 물질을 고르게 도포해야 한다. 이 액체 물질의 명칭이 포토레지스트다. 특히 최근 초미세 회로 제조를 위해 각광받는 EUV 노광을 하려면 기존과는 다른 고급 EUV용 포토레지스트가 필요하다. 반도체 파운드리 사업 육성에 심혈을 기울이는 삼성전자가 활용하는 EUV 포토레지스트의 상당량이 JSR 제품이라는 것은 그만큼 국내 반도체 생태계에서 이 회사의 존재감이 상당하다는 뜻이다. 지난해는 새로운 EUV 포토레지스트 분야를 개척 중인 ‘인프리아’라는 업체를 인수해 이 분야에서 덩치를 키우고 있기도 하다.
다만 JSR 반도체 소재 사업부는 우리나라에 포토레지스트 생산·연구개발(R&D) 인프라를 갖추고 있지 않다. 이 사실은 2019년 일본 정부가 대법원 강제 징용 판결을 꼬투리 잡아 EUV 포토레지스트 수출을 통제할 당시 우리나라에 치명적인 약점이 됐다. EUV 포토레지스트 핵심 공급망이 끊겨버리면서 삼성전자의 EUV 생산 라인이 멈출 수 있는 위기에 직면했던 것이다.
이 사태 이후 JSR은 벨기에 반도체 연구 허브인 아이멕(IMEC)과 합작해서 만든 법인 ‘RMQC’에서 EUV 포토레지스트를 만들어 한국으로 우회 공급하고 있다. 영향력은 나날이 커지고 있다. 관세청 자료에 따르면 2019년 이후 벨기에에서 건너오는 EUV 포토레지스트 양은 매년 늘어나는 추세다. 2019년 연간 벨기에 산 포토레지스트 수입액이 264만 달러에 불과했는데 연간 수입액이 점차 우상향해 올해는 1월부터 9월까지만 해도 5123만 달러를 기록했다. 3년 새 20배 이상 증가한 셈이다.
만약 JSR이 한국에 EUV 생산 기지 현지화에 착수한다면 벨기에 라인에 의존 중인 한국의 JSR 소재 공급망을 국내로 옮겨올 수 있어 상당히 긍정적인 효과가 예상된다. 최근 미국의 강도 높은 중국 반도체 제재 등 치열한 글로벌 반도체 인프라 확보전 속에서 핵심 소재 공급사의 생산 현지화가 이뤄지면 우리나라 업체들은 이 경쟁에서 상당히 유리한 고지를 확보할 수 있다. 안진호 한양대 신소재공학부 교수는 “국가 간 분쟁으로 반도체 공급망이 붕괴되면 국내 기업들은 의도와 상관없이 사업에 큰 차질이 생길 수 있다”며 “우리만의 공급망을 확보하는 것이 주요 국가 간 치열한 반도체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안”이라고 설명했다.
JSR의 현지화 추진 외에도 이미 다양한 일본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들이 국내 생산 현지화에 속도를 올리는 모습은 상당히 긍정적이다. 지난해 일본 도쿄일렉트론(TEL)은 2000억 원을 들여 국내에 연구개발 거점을 마련해 한국 기업들을 지원하기로 했다. 2019년 일본 수출 규제 이후 일본 유력 반도체 소재 기업 도쿄오카공업(TOK)은 인천 송도에 EUV 포토레지스트 생산 라인을 일찌감치 마련하고 생산에 들어갔다. 또다른 일본 소재 회사 신에쓰화학도 TOK와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 EUV 포토레지스트 생산을 타진하고 있다. 올해 스미토모화학은 국내 자회사 동우화인켐을 통해 EUV 포토레지스트 출하를 시작했다.